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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녀는 마치 구경난 것처럼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예전처럼 와장창 무너지길 기다리는 듯싶었다. 하긴, 예전엔 정말로 그들 관계 때문에 수없이 무너졌었다. 연애 기념일에는 윤서아의 전화 한 통에 바로 달려나가는 배승훈,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밤을 지새우며 PPT를 만들기 싫으니 이 남자에게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내가 고열로 폐렴에 걸려 입원했을 때, 윤서아가 정전이 되어 어둡다고 하니 배승훈은 한달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천둥번개가 치던 밤, 윤서아의 답장이 늦어지자 그는 걱정된다면서 찾아 나서더니 결국 둘이서 와인을 마시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순수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따져 묻기도 했고, 자존심 다 내려놓고 매달려도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영원히 그의 차가운 한마디였다. “그만 좀 해.” 배승훈이 갖은 핑계를 둘러대며 나와 함께 이 맛집에 오지 않았던 이유는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여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팩트에 과거의 나였다면 얼마든지 좌절하고 고통에 휩싸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히 깨달았다.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죽어라 몸부림쳐도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하고 그저 내가 시끄럽다고 여길 뿐이다. 나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뭘 봐? 사진이라도 찍어줄까?” 배승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가에 스친 당황스러움이 순식간에 분노로 변했다. “이가영, 지금 우리 미행한 거야? 말투가 왜 이렇게 꼬였어?” “네가 멋대로 헤어지자고 했잖아. 기회를 줬는데도 안 받아들인 건 너야.” “기분이 꿀꿀해서 오랜 친구랑 밥 먹고 사진 좀 찍은 건데, 뭐가 그렇게 심각해?” “너 이렇게 스토킹하는 거 숨 막히고 질식할 것 같아. 나를 더 밀쳐내는 거라고!” 이 남자가 내게 이렇게까지 길게 말하는 건 참 드문 경우였다. 결코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찔려서겠지. 이제 이런 것 따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밥 먹으러 온 거야. 그리고, 우린 이미 헤어졌어. 너희들이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다고!” 윤서아가 눈썹을 살짝 치켰다. 내 반응이 예상 밖이었나 보다. “가영아, 홧김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그녀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내가 속이 안 좋다고 해서 승훈이가 종일 함께해준 거야. 괜한 생각 마라. 우린 그냥 친구일 뿐이야.” 그녀는 사실 좀 어장 치는 경향이 있다.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마냥 우스울 따름이었다. 분명 배승훈을 받아들일 마음도 없으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여지를 주고 있다니. 이 짓거리가 재미있는 걸까? 뭐가 됐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더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두 남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둘을 등지고 앉을 만한 테이블을 고른 뒤 메뉴판을 열었다. 과거에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면 나는 울고 불며 모양새 빠지게 뛰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한 건 내가 아닌데, 난 그저 오랫동안 찜해뒀던 맛집을 체험하고 싶을 뿐인데 피할 이유가 있을까? 좋아하는 음식들로 이것저것 잔뜩 주문했고 더 이상 그 누구도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매콤하고 향긋한 음식들이 하나둘씩 테이블에 올라왔다. 하찮은 인간들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놓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지 몸소 깨달았다. 두 남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화 소리가 쉴 새 없이 귀를 때렸다. “너 왜 이렇게 투박해졌냐? 예전엔 꽤 자상했잖아.” 더없이 익숙한 가벼운 손짓, 안 봐도 비디오지 뭐. 윤서아가 다정하게 배승훈을 툭 치는 소리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수학 시험 망치고 나서, 매일 책상 위에 내가 좋아하는 나리꽃이 놓여 있었잖아. 나중에 알고 보니 너였더라. 나 달래주려고 보낸 거였지.” “중학교 3학년 땐 수능 때문에 스트레스받았는데 네가 매일 유명인 명언을 필사해서 내게 줬었잖아. 에너지 충전뿐만 아니라 작문 실력도 높여준다고 하면서.” “고등학교 때는 아침밥을 빠짐없이 챙겨주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한밤중에 알람을 맞춰 한정판 피규어도 대신 구해주더니 왜 여자친구한테는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 말끝마다 드러내는 저 우월감, 뻔히 알면서 묻는 애티튜드. 한편 배승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걔가 너랑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 나는 태연하게 반찬을 집어 먹었지만, 매운맛에 눈물이 핑 돌 뻔했다. 7년의 감정이 겨우 이 한마디로 대체되다니. 나 또한 수없이 자신을 탓해왔다. 내가 무언가 부족했기에 그가 나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반성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진작 모든 진심과 열정을 다른 여자에게 쏟아부었고, 지금까지도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나는 배승훈을 진짜 단념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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