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그날 이후, 배승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가 늘 쓰던 방식이었지.
변명도, 사과도 없이 그저 차갑게 내버려 두는 것.
나를 내적 고통에 시달리게 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의심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하는 것.
그 후, 홀가분한 몇 마디로 나를 달래면 우린 다시 화해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오롯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 남자를, 이 감정을 단념하기로 했다.
짐 정리를 시작했다. 온 집안에 내가 직접 꾸민 커플 용품들로 가득했다. 정작 내 물건이라 할 것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랬다.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으로 살지 못했다.
긴 연휴가 지나고, 나는 정식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팀장은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다.
“한주시로 돌아가는 거야? 배 부장이랑 곧 좋은 소식 있겠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혼자 가요.”
팀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됐네요. 이제 그만 숨겨. 내 친구가 우진 그룹 인사팀인데, 너희 배 부장이 이미 한주시 우진 그룹 본부로 발령 신청을 냈대. 가족 동반도 가능하니 신청서까지 다 냈다잖아. 너 때문인 거 뻔하지 뭐.”
“그러고 보니 명문대 출신인 네가 고향을 떠난 건 제쳐두고 이 작은 회사에서 프런트 데스크 직원으로 일하는 건 너무 아깝지. 이제 곧 보상받을 때가 된 거야. 고생 끝에 낙이 온 거지.”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배승훈은 단 한 번도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해준 적이 없다.
우리 둘 다 디자인 전공이었고, 밤낮없이 일에 파묻히는 직업이었다.
그는 ‘우리 둘 다 일에만 매달릴 순 없으니, 한 명은 좀 더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희생하는 그 역할을 맡았다.
그가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릴 때, 나는 그저 옆 회사 디자인팀의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었다.
가정에 충실하기에 충분했고, 나 자신을 묻히기에도 충분했다.
배승훈이 데려갈 가족은 아마 내가 아닌 듯싶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팀장이 한 말 중에 그 말만은 맞았다. 나도 이제 보상받을 때가 되었고 고생 끝에 낙이 올 터였다.
저녁에는 부서 동료들이 나를 위한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약간 취기가 오른 채 복도를 걸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열린 룸 안에서 배승훈이 술기운이 오른 얼굴에 지그시 담배를 짚고서 뽀얀 연기 속 복잡한 표정을 내비쳤다.
“가영이 안 데려가는 거 후회하냐고? 절대 아니!”
“처음에 본부로 발령 신청 낸 건 가영이 때문에 맞아. 몇 년 동안 가족들과 의절하면서까지 날 위해 애쓴 거 다 알거든.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함께 한주시로 돌아가려고도 했지.”
“그런데 막상 서아가 부탁하니 거절할 수가 없더라.”
그의 친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너 그건 생각 안 해봤냐? 서아가 여태껏 널 안 받아줬는데 한주에 가면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난 왠지 더 희박해 보이는데?”
배승훈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모든 걸 걸어볼 용기가 있어야 하잖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서아가 그래도 날 안 받아주면 그땐 정말 단념하고 가영이랑 결혼해서 잘 살 거야.”
나는 저도 몰래 주먹을 꽉 쥐고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사실 윤서아가 막 돌아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안 질 줄 알았다.
그녀는 배승훈에게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남자와 수년을 함께했고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과 추억들이 내겐 디폴트로 적용됐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영원히 기다려줄 거라고 믿는 걸까?
“이가영?”
별안간 윤서아가 화장실 쪽에서 걸어 나오며 눈가에 드물게 경계심이 엿보였다.
“혹시 다 알았니? 소용없어! 가족 명단은 올라갔고, 이 기회는 내가 반드시 잡을 거야.”
나는 전후 사정을 모두 이해했다.
윤서아가 공들여서 그와 애틋한 관계를 이어가며 여지를 줬던 것은 결국 이 남자한테서 얻을 수 있는 이까짓 혜택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됐다.
“네가 단지 배승훈 이용한 거고,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으면서 내 앞에선 왜 그렇게 배승훈이 잘해준다고 티 낸 거니?”
수없이 보내온 도발적인 사진과 문자들, 그녀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윤서아는 팔짱을 끼며 가볍게 웃었다.
“그건 말이지, ‘내가 갖지 못하는 것들은 남들도 편히 소유하지 말아라.’라는 욕심이랄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렸다.
배승훈 역시 또 다른 나였구나. 수년간 진심을 개나 줘버린 인간, 고작 ‘물건’ 취급만 당한 어리석은 이 남자.
돌아서서 자리를 떠나려 할 때, 그녀가 길을 막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난 승훈이가 널 향한 죄책감을 안고 떠나는 건 원치 않거든.”
윤서아가 갑자기 두 손으로 힘껏 박수를 치더니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내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배승훈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나를 거칠게 밀쳤다.
“네 여친이 인사 발령 건에 대해 좀 불만이 있는 것 같아.”
그녀는 아예 멀쩡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편 나는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손으로 닦았더니 아니 글쎄 피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배승훈의 눈에는 깊은 분노만 휩싸였다.
찰싹.
이 남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들어 그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
“인사 발령 건으로 불만 가져본 적은 없지만 네가 확 밀치니까 나도 화가 나네?”
내 피가 그의 얼굴에 엉망으로 번졌다.
마치 엉망진창이 된 우리의 관계처럼...
“가영아, 너 이제 완전히 미친X 같아.”
배승훈이 고개를 돌리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헤어지자며? 오케이, 헤어져. 그러니까 내가 누구랑 가든 넌 상관할 자격 없어.”
“이번엔 너 달래줄 일 없으니까 배짱 있으면 내 앞에서 울고불고 화해하자며 빌지나 마!”
그는 나를 노려보더니, 윤서아를 부축하며 룸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되었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렇게나 비참한 방식으로 끝날 줄이야.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머리의 상처가 은은하게 아파왔고 심장까지 이유 없이 아려왔다.
다행히 아무리 아프고 비참한 상처라도 언젠가는 낫고 다 지나갈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비행기에 올라 3년을 머물렀던 도시를 떠나 전부터 그리던 고향으로 향했다.
배승훈의 성격이라면 다시는 나를 찾아올 리 없겠지.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겠지.
하지만 일주일 후, 예상치 못하게 이 남자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번엔 꽤 세게 나오네? 혼자 울고 있을지언정 나한테 연락 안 한다 이거야? 뭐해 지금?]
나는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담담하게 답장했다.
[방금 약혼식 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