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비밀결혼 한 3년 동안, 그들은 내내 이런 식으로 부부의 의무를 다해 왔다.
오늘도 박재현은 평소처럼 집사에게 고성은을 은심각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녀는 늘 은심각을 가득 채운 순백의 백합을 좋아했다. 향이 뜰에 가득 퍼져서 꿈처럼 아름다운 느낌을 줬다.
하지만 3년의 기한이 오늘로 끝났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약속을 지키러 온 것만이 아니라 이혼합의서까지 챙겨 왔다. 방에 들어서자, 박재현이 욕실에서 막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역삼각 실루엣을 따라 물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선명한 복근을 타고 수건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조각 같은 얼굴은 마치 창조주의 걸작 같았다. 목욕 직후의 붉은 기가 얇은 입술에 어렸지만, 표정은 차갑고도 거리감을 줬다.
그는 말없이 고성은을 번쩍 안아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놀라서 소리치며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
박재현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물고, 손으로 그녀의 원피스를 잡아당겼다. 익숙한 담배 냄새에 스치는 은은한 술 향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오늘의 그는 여느 때보다 급했다. 너무 오래 못 만난 탓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키스했고, 방 안의 온도는 점점 높아졌다. 공기에는 은밀한 기운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매달 5일과 15일은 박재현과 고성은이 약속한 밤이었다. 날이 되면 집사가 그녀를 은심각으로 데려올 뿐, 두 사람은 함께 살지 않았다.
이제 때가 됐다. 그녀는 가방 속 이혼합의서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것이 계약 결혼의 운명, 그녀는 그의 시간을 겨우 3년 빌렸을 뿐이었다.
새벽, 고성은은 배고픔에 눈을 떴다. 옆자리 남자는 이미 사라졌고, 침대에는 체온도 남지 않았다. 온몸이 쑤셔 겨우 몸을 일으킨 그녀는 겉옷 하나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에서 집사가 맞이했다.
“사모님, 일어나셨네요. 출출하시죠? 대표님이 나가시면서 죽을 미리 끓여 놓으라고 하셨어요.”
“네, 고마워요.”
고성은은 느긋하게 앉아 죽을 떠먹었다. 휴대폰을 휙휙 넘기던 그녀의 눈에 인기 검색어 몇 개가 들어왔다.
[박재현 대표, 재정 그룹 딸을 위해 생일 파티 개최]
[박재현과 강세린, 파랑국에서 사랑의 약속을...]
그녀는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 몰려와 눈을 크게 뜨며 화면을 응시했다.
‘강세린?’
알고 보니, 그의 첫사랑은 강세린이었다.
이 멋진 은심각은 매번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고성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기사 사진 속 절세 미남의 얼굴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박재현이었다.
그는 미인을 품에 안고 무척이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가 태생적으로 차가워서 웃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단지 그녀에게만 웃지 않았던 것이었다.
강세린의 목에는 백합 모양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그 광채가 그녀의 눈을 콕콕 찔렀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텅 빈 침대를 바라보자 눈동자에 한층 더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박재현은 참 지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후에는 자신과 침대에서 몸을 섞더니, 밤에는 파랑국까지 날아가 첫사랑의 생일을 챙기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10분 뒤, 고성은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집사에게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여기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집에 돌아온 그녀는 가방에서 이혼합의서를 꺼내 펼쳐 보았다. 한 달 전부터 준비해 둔 그것, 오늘 박재현에게 건네려 했지만 그는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 점심, 그녀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절친 정수희가 스무 번이 넘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뭔 일 있나?’
그녀는 깜짝 놀라 서둘러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드디어 받네! 혹시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친구의 잔소리에 고성은은 난감한 듯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목숨도 아껴.”
한잠 자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막막하지도 않았다.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바로 비행기 타고 갈게.”
정수희가 말했다.
“응, 기다릴게.”
전화를 끊자 마음이 한없이 허전했다. 고성은은 천장을 바라보며 박재현과 보낸 지난 순간들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 그가 어떤 반에 가면 그녀도 따라갔고, 그가 해외로 갔을 때도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가 의대를 택하자 그녀 역시 망설임 없이 의대를 골랐다. 심지어 그가 바다에 빠졌을 때도 그녀는 함께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3년 전, 그는 교통사고로 시력을 잃고 나서 첫사랑이 해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고성은이 찾아왔다.
그때 려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힘을 써서 그녀를 박씨 가문에 시집보냈다. 처음에 박재현은 그녀를 몹시 싫어했지만 박세홍의 계략으로 두 사람은 어찌저찌 부부가 되었다. 이후 끊임없는 2세 재촉 끝에 한 달에 두 번 부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결혼 2년 차가 되어서야 박재현의 눈이 치료되었는데,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온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고 얼굴에는 혐오만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온기로 그를 녹일 수 있을 거라 믿었으나, 불씨는 그녀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전화벨이 다시 울리며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 전화를 받자 상대는 두 마디만 남기고 바로 끊었다.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박재현의 어머니, 즉시 본가로 오라는 말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곱씹을 새도 없이 그녀는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후 4시, 고성은은 박씨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다.
박씨 가문은 영진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가문은 거대했고 박세홍에게는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박재현은 장손이어서 더욱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고성은이 홀로 들어서자 장인옥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살벌하게 고성은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가 아버님한테 고자질했지? 평소에는 말도 없더니 뒤에서 수작을 부렸구나.”
고성은은 적의로 가득한 시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사모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재현이가 서재에서 벌을 받는 중이다.”
그녀가 눈짓을 보내자 집사가 고성은을 위층으로 이끌었다.
서재 가까이 다가가자 고성이 들려왔다.
“이런 불효자식이 있나! 감히 말대꾸를 해? 할아버지 쓰러지는 꼴 보고 싶어?”
박세홍은 문을 닫고 손자를 다그치며 피 토할 듯 분통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강요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약속하셨잖아요, 3년 안에 고성은이 임신하지 못하면 이혼하고 재혼하게 해 주신다고요.”
“이 망나니야, 이혼이라니? 너희는 아직 부부다. 그 강 어쩌고 하는 여자와 더 이상 스캔들이 퍼지게 둘 수 없어. 당장 공식 입장을 내서 해명해!”
“인터넷에 뭐가 퍼지든 저는 못 막아요. 할아버지가 굳이 신경 쓰실 것도 없어요!”
“내가 너를 때려죽여야 속이 편하겠다.”
안에서는 쿵쿵 쾅쾅 소리가 이어졌다.
고성은은 마음을 추스르고 노크했다.
문이 열리자 박세홍은 고성은을 보고 눈에 띄게 놀랐다.
“우리 성은이가 왔구나!”
“할아버지, 그러다 몸 상하시겠어요.”
고성은은 그를 부축해 방 안으로 모시며 부드럽게 웃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 하냐. 성은이한테 사과 안 해?”
박세홍이 박재현을 호되게 나무랐다.
박재현은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 가득 경멸을 띠었다. 3년의 기한이 끝나는 날에 맞춰 기사를 터뜨린 것도, 그녀가 알아서 물러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저 재현이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
고성은이 말하자 박세홍도 눈치껏 방을 비웠다.
고성은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박재현, 우리 이혼하자.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박재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괴물 보듯 바라봤다.
그는 그녀가 본가로 온 목적이 박세홍을 등에 업고 난리 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덤덤하게 이혼 두 글자를 꺼내다니 너무나도 생각 밖이었다.
‘이렇게 자리를 내놓는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일단 서류부터 처리하자. 너 편할 때 할아버지한테 말해.”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보상은 뭘 원해?”
“필요 없어. 깔끔하게 끝내자. 이건 내가 미리 써 놓은 이혼합의서야.”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합의서는 가방에서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박재현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꿰뚫었다.
“눈치는 있네. 당연히 손해는 안 보게 해줄게. 내일 오전 회사로 와서 서명해. 법무팀에 새로 합의서 쓰라고 할 거야.”
속뜻은 합의서 내용은 그녀가 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좋아, 갈게.”
고성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훑어보고 서재를 나섰다. 그녀에게 깔끔한 이별은 이 결혼에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고성은은 본가에 머물며 저녁을 먹은 뒤, 떠나기 전 박세홍을 꼭 안았다. 그리고 차에 오를 준비를 했다.
그 순간 하늘이 울기라도 하듯 비가 쏟아졌다. 처연한 빗소리가 마음을 찔렀다.
몇 걸음 옮기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복통에 휘청거렸고 뜨거운 피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