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고성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생리가 왔나?’
그녀는 황급히 차로 달려갔다. 차를 몰고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렀다.
‘안 되겠어. 너무 아파!’
더는 버틸 수 없어 차를 급히 세운 뒤 휴대폰을 꺼내 정수희에게 전화했다.
“수희야... 너 돌아왔어? 나 좀... 데리러 와 줘.”
“성은아, 지금 어디야? 무슨 일 있어?”
“나... 박재현 본가에서 내려가는 산길에 있어...”
곧이어 밤을 가르는 구급차 사이렌이 울렸다. 정수희가 다행히도 구급차를 불러 주었던 것이다.
고성은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였다.
여러 검사를 거친 뒤, 고성은은 유산 판정을 받았다. 임신 6주였다고 한다.
침대에 누운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번졌다. 만나 보지도 못한 아이가 불쌍했다.
정수희는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아 욕설을 내뱉었다.
“개자식, 네가 임신한 것도 몰랐던 거야? 임신한 애를 은심각까지 불러들여서 죽도록 굴려?”
고성은은 원래 생리 주기가 들쭉날쭉했기에 임신 사실조차 몰랐다.
이 아이는 지난달에 생긴 아이일 것이다. 지난달에는 은심각에 불려 가지 않았고, 대신 안영국에 갔었다.
그때 그는 안영국에 출장을 나와 있었고, 그녀를 불러 사흘을 함께 지낸 뒤에야 돌려보냈다. 그는 그때 이미 이번 달 몫까지 써 버렸다고 경고했는데, 결국 이번 달에도 예정대로 그녀를 부른 셈이다.
바로 그때 여자 의사가 노크하며 검사 결과지를 들고 들어왔다.
“참 부주의하셨어요. 임신 사실을 알면서도 피임약을 드시다니요. 안 그러면 이 아기는 지킬 수 있었어요.”
‘피임약?’
말이 떨어지자 고성은과 정수희는 동시에 굳어 버렸다.
고성은은 박재현과 한 번도 피임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몸 안에 어떻게 피임약 성분이 있다는 말인가?
정수희는 다시 불길처럼 화가 치밀었다.
“하, 강세린 그년 때문에 몰래 약까지 먹여? 애 가지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 왜 사람을 이렇게 망가뜨리냐고!”
그 순간 고성은의 가슴은 수많은 바늘에 찔리듯 아팠다.
‘정말 박재현이 그런 걸까?’
매번 만남이 끝나면 그는 도우미들에게 죽 같이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어 오라고 했는데, 혹시 그 음식들에 약을 탄 건가 싶었다.
‘지난달 안영국에서는 약을 먹일 틈이 없었지. 그래서 이번 달 예정에 없던 약속을 잡은 건가? 그 약을 먹이려고?’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온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기다려. 지금 당장 걔네 집으로 가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정수희가 핏발 선 얼굴로 휴대폰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수희야.”
고성은은 쉰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가지 마.”
“성은아!”
정수희가 그녀를 돌아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걔가 네 아이를 죽였어! 그냥 넘길 거야?”
고성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의 눈에는 살얼음 같은 증오와 결의만이 남아 있었다.
“나 박재현이랑 이혼하기로 했어.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잠시 숨을 골랐다가 그녀는 또렷이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반드시 밝힐 거야. 나 몰래 손댄 놈은 한 놈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그녀의 눈빛이 너무 차갑고 날카로워 정수희조차 오싹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아는 고성은, 겉으로는 연약해 보여도 뼛속은 누구보다 단단한 여자였다.
정수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성은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지 마. 그 복수, 우리 같이 해. 누구든 꼭 피눈물 흘리게 할 거야.”
...
한밤중, 천둥소리에 고성은은 다시 눈을 떴다.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희미한 조명을 바라보며 생각은 멀리 흩어졌다.
그녀는 12살이던 해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때부터 박재현을 무려 12년을 따라다녔고, 온갖 고생 끝에 그의 곁으로 왔다. 그동안 줄 수 있는 건 모두 주었다.
이번에 아이를 가진 것은 실수였을 뿐이다.
모르는 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운명이 마지막 방패마저 앗아 가 버린 듯, 낮에 보여 준 강인함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것은 그녀와 그가 맺은 3년짜리 결혼의 마지막 잔향이었다.
아이는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부짖었다.
밤은 먹물을 쏟아부은 듯 깊었다. 창밖에는 폭우가 퍼붓고, 빗방울이 유리를 마구 두드리며 광란의 악장을 연주했다.
박재현은 헉헉대며 식은땀으로 범벅된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그 꿈이다.
뼛속까지 차가운 물에 잠겨 아무리 버둥거려도 숨을 쉴 수 없고, 끝없이 가라앉아 칠흑 속으로 추락하는 너무도 생생한 질식의 공포였다.
그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고, 통유리 창문 앞으로 다가가 빗발치는 도심을 내려다봤다. 밤비가 아무리 내려도 가슴속 먹구름은 씻기지 않았다.
바로 위스키를 가득 따라 들이켰다. 타는 듯한 술이 목을 할퀴었지만, 이유 모를 불안과 공허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무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는 무언가가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심장 한가운데가 은은히 욱신거렸다.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갈 곳 없는 통증이었다.
아침이 밝자, 고성은은 간호사에게 실려 수술실로 들어갔다. 차디찬 기계, 눈부신 조명, 매캐한 소독약 냄새가 뒤섞였다.
의사는 차트를 보며 눈살을 깊이 찌푸렸다.
“자궁 안에 잔여물이 남아 있어서 수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환자분한테 유전자 결함도 있고 대부분의 마취제에 알레르기가 있으니, 이번 수술에는 마취를 할 수가 없어요.”
즉, 거의 맨정신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다.
고성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과 한기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는 있는 힘껏 꽉 악물었고, 손톱은 손바닥 살이 파열될 만큼 깊이 파고들었다.
차가운 기구가 몸 안을 파고드는 순간, 날카로운 찢김이 전신을 휩쓸었다.
“윽...!”
꾹 참다가 터져 나온 신음이었다. 이마에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오장육부가 뒤틀려 갈리는 듯했다.
눈물이 제멋대로 터져 흘러내리고, 땀과 뒤섞여 시야를 흐렸다.
아랫입술은 하도 물어뜯어 피 맛이 입안을 번졌다.
‘이 고통, 반드시 기억할 거야.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누가 아이를 빼앗았는지,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와 신경을 갉아 먹었고, 그녀는 거센 파도에 떠밀린 작은 배처럼 금세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얼마 못 가서, 그녀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같은 시각, 배성 그룹 대표이사실.
박재현은 휴대폰을 노려보며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 벌써 오전 10시가 됐는데도 고성은의 휴대폰 전원은 꺼져 있었다.
‘잠수를 탄 건가?’
오늘은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로 한 날이다. 연락이 되지 않으니 바람맞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박재현의 가슴속에는 화가 솟아올랐고 휴대폰은 책상에 퍽 내려쳤다.
아침부터 기분이 뒤숭숭한 것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설마 고성은한테 무슨 일이 있나? 그럴 리가. 또 동정을 끌어내려는 수작이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을 미루려는 핑계일 뿐이야.’
그녀가 또 어떤 연극을 꾸밀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