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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수술실 밖, 시간은 유난히 더디게 흘렀다. 정수희는 안절부절못하며 복도를 오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봤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고성은이 누운 침대를 밀고 나왔다. 고성은은 깊이 잠들었지만 뺨에는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창백한 입술에는 살짝 씹힌 자국까지 보였다. “성은아!” 정수희가 달려왔다. 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하지만 환자 상태가 너무 허약합니다. 제대로 몸조리 안 하면... 앞으로 임신이 힘들 수도 있어요.” 정수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든 친구를 보며 눈물이 또 차올랐다. ‘이 착한 애가 어쩌다 박재현 같은 인간을 만나서 이런 고생을...’ 고성은이 눈을 뜬 건 오후였다. 정수희의 어머니가 김 모락모락 나는 고기죽을 들고 들어왔다. “성은아, 일어났니? 따뜻할 때 얼른 먹어.” 그녀는 고성은의 창백한 얼굴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고성은은 힘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 너는 가만히 누워 있으면 돼. 내가 먹어줄게.” 그녀는 재빨리 고성은을 부축했다. 그리고 죽 한 숟가락 떠서는 후후 불며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딱하기도 하지. 겨우 얻은 아이를 이렇게 잃어버리다니...’ 한때 고성은이 갈 곳이 없었을 때, 친구였던 정수희가 그녀를 자신의 집에 데려간 적 있다. 고성은의 학업은 정씨 가문 덕분에 계속할 수 있었다고 보면 된다. 정수희의 어머니도 고성은을 친딸처럼 아껴줬다. 조금이나마 죽을 삼키자 속은 따뜻해졌지만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한편, 방 한쪽에서 정수희는 휴대폰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격앙된 말을 쏟아냈다. “고세형! 내 말 똑바로 들어. 너 계속 박재현 같은 인간이랑 어울리면 우리 바로 파혼이야! 파혼 하고 평생 얼굴도 보지 말자!” 전화를 끊고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고성은이 나직이 말했다. “수희야, 나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정수희가 말을 잘랐다. “고세형 걔가 눈치 없는 거지! 너를 이렇게 만든 놈이랑 친구 한다고? 그게 말이 돼? 그건 나쁜 놈 편을 드는 거랑 다를 바 없어.” 정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오래전부터 가문끼리 혼인을 정해 두어, 두 사람은 18살에 약혼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정수희의 공주병은 여전했고, 고세형은 늘 골머리를 앓았다. 그 시각, 해청 최고급 프라이빗 클럽 화연. 실내에는 은은한 음악이 흐르고, 비싼 술과 향수의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고세형은 휴대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옆에 앉은 박재현을 힐끗 보며 투덜댔다. “또 왜 이러지? 내가 너랑 어울리면 파혼하겠다는데?” 박재현은 긴 손가락으로 잔을 굴리며 위스키를 흔들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도 눈썹만 살짝 올렸을 뿐,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옆자리의 최민우가 피식 웃었다. “오늘도 시끌시끌하네. 네 약혼녀 재현이한테 악감정 있나 봐. 벌써 이런 선택하라는 거 보면.” 고세형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올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니까. 무시하고 술이나 마시자.” 그때 룸 문이 열리며 새빨간 슬립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요염한 곡선을 그리며 들어섰다. 바로 강세린이었다. 강세린은 강씨 가문의 귀한 딸이자 톱스타였다. 어제 박재현과 화려하게 치른 생일 파티로 팬덤이 이천만을 넘어섰고, 하늘의 별처럼 화려한 존재로 이름 박혔다. 만약 그녀가 박씨 가문으로 시집가면 해청에서 가장 귀한 여자가 될 터였다. 재벌가 안주인이라니 상상만 해도 황홀했다. 강세린은 박재현의 곁으로 곧장 다가가 사람들의 놀라움과 질투 섞인 시선을 무시한 채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어깨에 기댔다. “재현 오빠, 이번 주말 열리는 배성 그룹 창립 기념식 말이에요. 제가 오빠 파트너로 같이 가도 될까요?” 더는 숨겨진 존재로 있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3년이면 충분히 기다리고도 남았다. 박재현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내일 드레스 주문해 줄게.” 강세린은 환하게 웃었다. “역시 오빠가 최고예요.” 최민우가 잔을 들어 올렸다. “형수님, 이제 곧 정식으로 자리 잡으시겠네요. 축하드립니다.” 고세형도 장난스레 거들었다. “그러게요. 3년 계약도 끝나 가니까 이제 정말 고생 끝이네요.” 박재현의 두 친구가 모두 강세린의 편인 건 분명했다. 그들은 박재현이 고성은을 데리고 나온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게다가 그의 결혼은 비밀이라 세상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했다. 고성은이라는 존재 역시 있으나 마나였다. 강세린은 잔을 들어 두 사람과 가볍게 부딪쳤다. “두 분 고마워요.” 해청 4대 가문 중 세 가문의 자제가 그녀의 곁에 섰다. 박재현과 고성은의 결혼만 끝나면 그녀는 당당히 박씨 가문에 입성할 수 있을 터였다. 띵. 최민우가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헐, N신이 돌아온대!” 그가 화면을 내밀자 큼지막한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청조 테크 창립자 N신, 다음 달 글로벌 의료 서밋 참석 확정!] 최민우의 목소리는 믿기 힘든 기쁨으로 약간 떨렸다. “우리 할머니 살길이 생겼어! 진짜 다행이다!” 그의 할머니는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니, 이 소식은 그야말로 단비였다. 곧 주변에서 더 큰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N신? 3년 전 암 치료 이론을 내놨다가 바로 전설이 된 그 N신?” “헐, 드디어 나타나는 거야? 난 하늘로 승천한 줄 알았는데!” “청조 테크도 의료계 전설이잖아. 그 이론 덕분에 말기 환자들이 얼마나 살아났는데!” “맞아! 그때 천재처럼 등장해 이론 하나 남기고 사라졌지. 이번 복귀는 핵폭탄급이야. 다음 달 서밋 난리 날 걸.”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박재현의 깊은 눈에도 뜨거운 빛이 번뜩였다. 배성 그룹의 의료 산업은 이미 국내 1위였다. 그는 4년 전 22살의 나이로 의학, 경영학 두 박사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후 전국 최고 수준의 지능형 의료 시스템을 구축해 불과 4년 만에 해청 재계 정상에 올랐다. 그의 지휘 아래 배성 그룹의 사업은 80여 개국으로 퍼져 나갔고, 그는 명실상부한 천재 재벌 2세가 되었다. 그러나 N신은 의학계의 전설이자 리더십의 상징이었다. 박재현에게 N신은 신비한 섬 같이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만약 N신이 배성 그룹과 손잡는다면, 그룹의 글로벌 의료 위상은 정점에 서게 될 것이다. 박재현은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고세형도 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청조에서 이번에는 꽃향기 요법을 발표할 거래. 듣기로는 특정 꽃향기 분자에 유전자 편집 기술을 결합해서 암세포만 정밀 타격한다네. N신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것 같아.” 그러자 모두가 한마디씩 보태며 N신의 복귀가 가져올 혁신을 열띤 목소리로 떠올렸고,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바로 그때 룸 문이 살짝 열렸다. 젊은 웨이터가 트레이를 들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하지만 세 가문의 자제들이 모여 있는 광경에 잔뜩 긴장해 그만 몸이 앞으로 쏠렸다. 트레이 위 잔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쾅! 쨍그랑! 날카로운 유리 파편 소리가 적막을 갈랐고, 바로 옆에 있던 강세린은 피할 새도 없이 몸만 웅크렸다. “꺅!” 비명과 동시에 박재현이 재빠르게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 덕분에 얼굴로 튀던 파편은 막았지만, 깨진 잔이 강세린의 하얀 손등에 두 줄의 상처를 남겼다. 박재현의 미간이 깊이 구겨졌다. 선명한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젠장.” 그는 하얗게 질려 선 채 벌벌 떠는 웨이터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봤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당장 꺼져.” 웨이터는 기겁해 비틀거리며 밖으로 도망갔다. “오, 오빠... 손이 너무 아파요...” 강세린이 울먹이며 그에게 매달렸다. “괜찮아,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박재현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상처 난 손을 조심스레 피해 그녀를 번쩍 안아 룸을 나섰다. 병원. 소독약 냄새가 스미는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서 박재현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박재현은 강세린을 병상에 편히 눕힌 뒤, 의사에게 상처를 꼼꼼히 살펴 단단히 붕대까지 감아 달라고 했다. 창백한 얼굴에 초라해 보이는 강세린을 바라보며 그는 몇 마디 달래준 뒤 잠깐 푹 쉬라고 당부했다. 그는 뒷일을 정리하고 집에도 전화를 걸 생각으로 처치실을 나섰다. 복도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시야 끝으로 반쯤 열린 옆 병실 문이 스쳤다. 낯익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고, 박재현의 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얀 시트, 창백한 얼굴. 병실 안에 한 여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꺼풀 아래로 연한 그늘을 드리우고, 가느다란 팔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투명한 약액이 한 방울씩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고성은? 고성은이 왜 병실에 누워 있는 거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쳐 그의 가슴을 거세게 조여 왔다. 박재현은 문을 밀어젖히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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