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상대는 고성은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창백한 조명이 초췌한 얼굴에 내려앉아, 한때 생기 넘치던 표정이 싹 가셔 있었다. 가는 손목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 투명한 수액이 조금씩 흘러들었다.
박재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가 또 말썽을 부렸나?’
그녀는 원래도 위가 약해서 몇 번이나 입원한 적 있었다. 그 시절을 잠시 떠올리다가 그는 생각을 떨쳐냈다. 시선은 다시 그녀의 창백한 입술로 향했다.
침대 위 고성은은 꿈자리가 편하지 않은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몸을 뒤척였다. 이불이 흘러내리자 박재현은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살포시 덮어 줬다.
손끝에 닿은 살결이 차가웠다. 그 순간 그는 손을 확 빼며 방금 자신이 뭘 했는지 깨닫고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이어서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박재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협소한 일반 병실 안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고, 낮은 층이라 창밖 소음도 그대로 들려왔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몸조리를 하라는 거지?’
그는 찌푸린 미간을 그대로 둔 채 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중앙 병원 302호, 고성은. 당장 최상층 VIP 병실로 옮겨줘.”
비서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지만 곧 두말없이 대답했다.
“네, 대표님.”
박재현은 잠시 뜸을 두다 덧붙였다.
“사올 식당에 가서 갓 만든 찐빵이랑 죽도 사와. 꼭 바로 만든 걸로.”
그녀가 예전에 가장 좋아하던 거였다. 왜 이렇게 또렷이 기억하는지, 왜 이런 지시를 내리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마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을 뿐... 그래, 분명히 그 이유일 것이다.
“사서 VIP 병실로 보내.”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에 누운 고성은을 바라보니 찡그린 미간이 살짝 풀린 듯했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등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걸음에는 여전히 냉랭함이 묻어났다.
강세린은 손등에 흰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처치실을 막 나섰는데, 복도 끝 일반 병실 구역에서 박재현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쪽은 일반 병실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지만 얼굴에는 완벽히 연약한 미소를 띤 채 빠르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재현 오빠, 아까 어디 갔어요? 나오는데 안 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말끝에 그녀는 슬쩍 그가 나온 병실 번호 302호를 확인했다.
박재현은 그녀의 붕대 감은 손을 힐끗 보고 무심히 말했다.
“별거 아니야. 방을 잘못 봤어.”
“그래요?”
강세린이 눈을 깜빡이며 달콤하게 웃었다.
“오빠도 덤벙댈 때가 있네요?”
물론 속으로는 차갑게 웃었다. 박재현이 길을 헤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302호에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말했다.
“손 아직도 아파? 치료 끝났으면 집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많이 안 아파요. 고마워요, 재현 오빠.”
강세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302호를 마음에 새겼다.
‘도대체 어떤 여우 년이 저 안에 있길래, 재현 오빠가 저런 곳까지 가는 거야?’
강씨 가문의 저택은 불을 환하게 밝힌 채 두 사람을 맞았다.
강세린의 어머니 서혜란은 과장된 움직임으로 달려 나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우리 금쪽같은 딸! 손은 왜 이래? 엄마가 좀 보자!”
서혜란은 딸의 손을 붙들고 속상한 척하면서도, 눈가는 계속 박재현을 향해 비굴한 웃음을 날렸다.
“박 대표님, 정말 감사해요. 우리 세린이가 폐 끼쳤죠!”
아버지 강우빈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줘서 감사해요, 박 대표님. 우리 세린이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었으면 이 계집애가 무슨 일을 터뜨릴지 몰라요.”
“괜찮습니다.”
박재현은 감정 기복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어 강세린에게 당부했다.
“약 제때 바르고, 며칠 동안은 물에 닿게 하지 마.”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재현 오빠.”
강세린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박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머무를 생각 없이 말했다.
“저는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시간 나면 자주 오세요!”
서혜란은 열정적으로 그를 대문까지 배웅했다. 마이바흐가 밤길 속으로 사라지자 그녀 얼굴의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지며 날카로운 계산이 번뜩였다.
그녀는 갑자기 강세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단호하게 외쳤다.
“세린아! 잘 들어! 박재현을 반드시 붙잡아야 해! 알겠지? 네가 박씨 가문에 시집가서 재벌가 사모가 되면 우리 가문도 따라 신분 상승할 거라고. 그러면 해청에서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게 될 거야.”
서혜란의 눈에는 권력을 향한 극도의 갈망이 번뜩였다. 표정만 보면 이미 강씨 가문이 성공한 그 때에 가 있는 듯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요.”
강세린은 자신감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박재현이 이혼합의서를 준비하도록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재현 오빠는 반드시 내 사람이 될 거야!’
고성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음식 냄새에 이끌려 깨어났다. 천천히 눈을 뜨자 머리가 아직 조금 어지러웠고, 속은 비어 있었지만 날카로운 통증은 많이 사라졌다.
초점이 맞춰지자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 보온 도시락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에는 사올 식당 로고가 찍혀 있었다.
‘찐빵? 죽? 이거... 누가 가져다준 거지?’
순간적으로 정수희를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마...’
익숙한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곧바로 지워버렸다.
‘말도 안 돼! 박재현이 나를 보러 온다고? 게다가 음식을 가져다줘? 그 인간은 차라리 내가 사라지기를 바랄 거야. 괜히 착각하지 마, 고성은.’
그녀는 자신을 비웃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핑크색 간호복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왔다. 얼굴에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미소가 자리했다.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몸은 어떠세요?”
고성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나아졌어요, 고마워요.”
간호사는 재빠르게 수액을 점검한 뒤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잘됐네요. 지금 병실을 옮겨 드릴게요.”
“병실을 옮긴다고요?”
고성은이 간호사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왜요?”
간호사는 더욱 달콤하게 웃었다.
“방금 위층 VIP 병실로 옮겨 드리라는 지시를 받았거든요. 그쪽이 환경도 좋고 조용해서 편히 쉬시기 좋을 거예요.”
“VIP 병실이라고요?”
고성은은 완전히 넋이 나갔고, 목소리에는 확신 없는 떨림이 섞였다.
“누, 누가 옮겨달라고 했는데요?”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입원하다가 랜덤으로 승급도 되나? 그럴 리가 없잖아!’
간호사는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저희도 몰라요. 윗선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라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류는 전부 처리됐으니 저랑 함께 가시기만 하면 돼요.”
고성은은 침대에 누워 간호사의 이미 다 정해졌다는 표정을 바라보며 더 혼란에 빠졌다. 먼저 테이블에 뜬금없이 나타난 찐빵과 죽, 그리고 이번에는 느닷없는 VIP 병실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바로 그때 정수희가 수프와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성은아, 이제 좀 괜찮아? 배고프지? 엄마가 정성껏 끓인 수프 가져왔어.”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테이블 위의 배달 상자를 보고 말했다.
“사올 식당이 언제부터 배달을 했지?”
고성은도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보내줬는지 모르겠어.”
정수희는 윙크를 날렸다.
“어머, 누군가 너를 짝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뭐랬어? 세상에 남자는 널리고 널렸는데, 왜 그 쓰레기한테만 매달리냐고.”
어딘가에서 박재현은 영문을 모른 채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이때 정수희는 문득 큰일을 떠올린 듯 침대 곁에 앉았다.
“근데 너 아직 퇴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복귀 발표부터 한 거야?”
고성은은 다시 멍해졌다.
“복귀?”
정수희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상위 다섯 개 검색어가 전부 N신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N신이 서밋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다.
고성은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렇게 대놓고 발표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두 명뿐이다. 그녀가 아니라면 소식을 퍼뜨린 사람은 틀림없이 그 사람이었다.
그녀와 박재현의 3년 계약이 막 끝난 참이다. 그런데 그는 하루도 못 기다려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