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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며칠을 쉰 끝에 고성은은 드디어 퇴원했다. 그녀는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몹시 싫어해서 1분도 더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정수희는 출장 중이라 운전기사를 보내 그녀를 데리러 오게 했다. 고성은은 아직 힘이 빠진 몸을 이끌고, 결혼 전에 자신이 사 두었던 아담한 아파트로 돌아왔다. 크지는 않았지만 구석구석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서 든든한 안정감을 주었다. 이곳은 늘 사람이 와서 청소를 했기에 집 안은 밝고 쾌적했다. 심지어 식탁 위의 꽃도 막 꽂은 듯 신선했다. 이 아파트는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가에 자리해 한 평이 금값인 곳이었다. 특히 발코니에서 보이는 전망이 뛰어나, 도로 위를 가득 메운 차들의 행렬이 한눈에 들어왔고, 시선을 조금만 올리면 80여 층짜리 배성 그룹 빌딩이 거인처럼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결혼하기 전 그녀는 종종 이곳에 서서 그 빌딩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곳에 있는 누군가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고, 지난 기억은 흩어져 버린 연기와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실내로 물러서서 커튼을 살포시 드리웠다. 아랫배에서는 여전히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간헐적으로 밀려와, 잃어버린 작은 생명을 묵묵히 상기해줬다. 고성은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몇 번 흔들어 쓰라린 감정을 떨쳐냈다.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손대지 않았던 노트북을 켜자 화면이 밝아지며 받은 편지함 맨 위에 별표 표시가 달린 안읽음 메일이 떠 있었다. 클릭하자 그녀의 눈빛은 메일 내용을 따라 점점 차갑게 굳어 갔고, 곧 키보드에 손을 얹어 몇 글자를 입력했다. [계획대로 진행해.] 전송을 누르고 노트북을 덮었다. 일련의 동작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조금 전의 나약한 모습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는 의사가 처방한 약을 꺼내 미지근한 물과 함께 삼켰다. 씁쓸한 맛이 혀끝에 퍼졌지만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몸의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오자 그녀는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눕혔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가 저물 무렵, 배성 그룹 대표이사실. 비서 임준기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오늘 퇴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청원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바로 사모님 명의의 아파트로 옮기셨습니다.” 박재현은 서류를 검토하다가 펜을 잠시 멈췄다. 다만 반응은 그뿐이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고 감정은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곧 고개를 들어 깊은 먹빛 같은 시선을 드러냈다. “걔가 어디에 살든 나랑 상관없어.” 원래부터 함께 살지 않았고 한 달에 한두 번 얼굴을 보는 게 전부였던 사이다. 임준기는 감히 말을 잇지 못했고, 주위 공기는 몇 도나 더 식은 듯했다. 박재현은 서명까지 마친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혼합의서를 보내서 최대한 빨리 서명하게 해.” “네, 대표님.” 임준기는 짧게 대답하며, 한 번도 진심 어린 관심을 받아 본 적 없는 고성은을 속으로 안쓰럽게 여겼다. ‘두 분 이제 진짜 끝내려고 하나 보네...’ 박재현은 다시 화면 속 숫자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조금 전 이야기는 마치 별 의미 없는 계약 건을 논의한 것에 불과한 듯했다. 다만 펜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희미하게 하얗게 질렸다. 바로 그때 강세린이 들어왔다. 임준기는 황급히 이혼합의서를 챙겨 들고 조용히 물러났다. 오늘 그녀는 화사하게 꾸며 사소한 손짓조차 여성스러움이 흐르고 있었다. 기분도 최고였다. 중앙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고성은이었고, 심지어 유산으로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집 정실부인이 임신하면 그렇게 애를 써도 떼어내지 못하더니, 고성은은 팔자가 약한지 제대로 품지도 못하고 결국 유산했다. 하늘이 그녀의 편을 들어준 셈이었다. ‘드라마에서도 이렇게까지 쉽지 않을 텐데.’ 아이가 없으니 고성은이 다시 박재현의 곁에 붙어 있을 명분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박재현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이건 분명히 그녀가 더 크게 활약할 절호의 기회였다. 박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빛에 한 줄기 부드러움이 어려 있었다. “어떻게 왔어?” 강세린은 환하게 웃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오빠랑 저녁 먹으려고 왔죠. 요즘 제가 조금 한가해서요. 더 자주 곁에 있고 싶어요. 다음 주에는 아주 유명한 드라마 오디션을 보러 가거든요. 생각만 해도 신나요.” 그녀의 밝은 표정을 바라보던 박재현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우리 강 배우가 고른 작품이라면 보통 물건은 아니겠네.” 강세린은 기다렸다는 듯 자랑스럽게 답했다. “배꽃 필 무렵 알아요? 지금 엄청 핫한 웹소설이에요. 수천만 팬이 연재를 기다리는 작품인데, 화관 엔터에서 억 단위로 판권을 샀대요. 온라인 투표로 가장 인기 높은 다섯 명만 여주인공을 두고 경쟁할 수 있는데, 제가 2위에 올랐어요.” 박재현은 그 작품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대형 뉴스였으니까. 아니었다면 그가 화관 엔터에서 거금을 들여 판권을 사게 둘 리도 없었다. 강세린은 화관 엔터의 간판 배우였고, 지난달 그는 이미 화관 인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연예계에 손대지 않는 주의였지만, 그녀의 미래를 지키려면 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비밀이지만, 언젠가 화관을 통째로 선물해 약혼 예물로 주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작은 손을 당겼다. “괜찮네. 네 실력이라면 1위도 가능해.” 강세린은 자연스레 그의 무릎에 앉아 두 팔로 목을 감싸안았다. “저는 오빠가 있어서 정말 좋아요. 오빠를 만난 뒤로 제 인생은 쭉 꽃길이었어요. 뒤에서 늘 도와주는 거 다 알아요. 제 일을 응원해 줘서 정말 감사해요.” 박재현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네가 행복하면 됐어.” 4년 전, 파랑국 바다에서 죽을 뻔했을 때, 만약 강세린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바다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사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강세린은 그의 매끈한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살포시 댄 채 다가가 달콤한 키스를 건네려 했다. 박재현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볼을 스쳤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강세린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박재현은 웃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반대편에서는 최민우의 흥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현아, 육정호가 돌아왔어. 소문으로는 오늘 남영 클럽에서 신비한 손님을 대접한다는데, 혹시 그 손님이 N신 아닐까?” 박재현은 잠시 놀랐지만 곧 눈빛이 번쩍였다.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그는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 육정호는 파랑국 재벌의 후계자이자 세계 의료 정상회의의 주최자이다. 그와는 4년 전 파랑국에서 한 번 스친 적이 있었다. N신이 참석한다는 소식이 갓 발표되자마자 그가 몰래 해청에 들어왔다. 왜 굳이 해청일까?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든 N신과 박씨 가문의 협력을 성사시켜야 했으니까. 강세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재현 오빠, 무슨 일 있어요?”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별일 아니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는 재킷을 집어 들고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사무실을 나섰다. ... 딩동. 딩동.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아파트의 적막을 깨뜨렸다. 고성은은 그 소리에 잠에서 깨 슬리퍼를 끌며 문 앞으로 갔다. 손잡이를 살짝 돌리자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한 남자였다. 낯익은 잘생긴 얼굴, 거기에 한층 더해진 성숙하고 안정된 기색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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