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6화

육정호는 재단이 완벽한 검은색 맞춤 슈트를 입고 있었다. 과시하지 않아도 고급스러움이 배어나는 원단이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를 또렷하게 드러냈다. 조명 아래 드리운 연한 그림자가 분명한 이목구비를 더욱 살아나게 했다. 놀라울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워 보였다. 오뚝한 콧날, 단단히 다문 얇은 입술, 조각처럼 날 선 턱선.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깊고도 냉혹한 눈빛이었다. 찰나의 시선만으로도 생사를 결정할 듯한 위압이 스며 있었고, 오래도록 높은 자리에 앉아 온 사람 특유의 냉담함과 위엄이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눈빛에 다리가 풀려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했을 테지만, 그 매서운 눈동자는 고성은을 보는 순간 믿기 힘들 만큼 부드러워졌다. 마치 얼음이 녹아내리듯 다정함에 가까운 감정이 번져 나왔다. 그 단어를 그에게 쓴다는 것은 터무니없게 느껴졌지만 분명히 사실이었다. 고성은은 완전히 굳은 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육정호? 선배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육정호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성큼 다가오더니 긴 팔을 뻗어 단호하게 고성은을 품에 끌어안았다. 쿵. 문이 닫히며 외부와 단절되었다. 그의 품은 넓고 단단했다. 은은한 우드 향과 함께 전해지는 따뜻함이 순간 고성은을 감싸안았다. 팔에 힘이 실려 뼈가 아릴 만큼 버거웠지만, 이상하리만치 전례 없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마디가 뚜렷한 큰 손이 고성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정수리에서 끝까지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육정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성은은 이 무언의 포옹 속에 수많은 말이 담겨 있다는 걸 느꼈다. 꾹꾹 눌러 두었던 그리움, 아무도 모르게 지속된 기다림, 입 밖에 낼 수 없던 걱정... 그렇게 3년이었다. 무려 3년 만의 재회였다. “성은아, 나 돌아왔어.” 낮고 쉰 목소리가 고성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3년 정말 길더라.” 그에게 3년은 거의 한 세기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터무니없는 계약 결혼을 끝내기를 기다려야만 조금씩 다가설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네 곁에 아무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게 할 거야.” 단호한 약속이 담긴 목소리였다. 고성은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숨을 돌릴 공간이 필요해 그의 품에서 살짝 빠져나왔다. 그리고 머리를 숙인 채 부엌으로 발을 돌리며 물었다. “선배... 뭐 마실래요?” “늘 마시던 거 줘.” 육정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고성은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 원두를 꺼내 갈아 내리고, 물을 붓고, 드리퍼를 돌렸다. 이 레시피는 박재현이 가장 좋아하던 것이기도 했다. 비록 그는 단 한 번도 그녀가 내린 커피를 마신 적 없었지만 말이다. 곧 그윽한 향이 퍼지는 핸드 드립 커피 한 잔이 육정호의 앞에 놓였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적당히 데워진 온기를 느끼며 한 모금 머금었다. 쓰고도 깊은 풍미에 은근한 단맛이 뒤따랐다. 그녀가 즐겨 쓰는 원두, 그녀만의 추출법, 그의 기억 속 깊이 새겨진 바로 그 맛이었다. 고성은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지만 목소리는 아직 흔들렸다. “선배... 왜 갑자기 돌아왔어요?” 육정호는 잔을 내려놓으며 테이블과 부딪히는 맑은 소리를 냈다. 눈길을 들어 고성은을 바라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에는 약간의 장난기와 반드시 얻고 말겠다는 기세가 숨어 있었다. “뭐야? 3년 만에 우리 내기까지 싹 다 잊어버린 거야?” ‘내기?’ 고성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애써 봉인해 둔 기억의 파편들이 물밀듯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육정호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칼날 같은 눈빛이 고성은의 눈을 단단히 붙잡았고, 한순간에 압도적인 아우라가 그녀를 휘감았다. “당연히 너를 데리러 왔지. 너를 데리고 다시 일 시작하려고.” ‘일을 시작한다고?’ 이 말은 천둥처럼 고성은의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육정호가 잠시 숨을 고르며 낮고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랑 같이 다시 정상에 서자.” 고성은은 얼어붙은 듯 말을 잃었다. 심장이 무엇에 움켜잡힌 듯 아리고 부풀었다. 가능하다면 장난스러운 말로 감정을 숨기고 싶었다. ‘선배, 아직도 중이병이에요?’ ‘정상은 바람이 세다는데, 저 추워요.’ 하지만 실패했다. 입꼬리를 겨우 올리기도 전에, 뜨거운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손등 위로 떨어졌다. 뜨거웠다. 육정호는 고성은의 대학원 시절 선배였다. 낯선 해외에서 외롭던 고성은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며 함께 밤새 연구실을 지켰다. 두 사람은 완벽한 파트너였고, 결국 고성은은 세상을 뒤흔들 이론을 도출해 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성은은 모든 걸 내려놓기로 했다. 몇 번 만나 보지도 않은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굴욕적인 3년 계약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고성은이 미쳤다고 했다. 육정호조차 말이다. 그는 분노로 책상을 뒤엎을 뻔했지만, 끝내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3년 뒤를 기약하는 내기를 남긴 채 해외로 떠났다. 그 뒤 고성은은 완전히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난 3년, 고성은의 삶은 고요했지만 동시에 새장 속에 갇힌 날개 부러진 새처럼 답답했다. 이제, 새장 문이 열렸다. 전에 함께 날던 사람도 돌아왔다. 거부할 수 없는 기세로 그녀를 하늘로 이끌려 한다. 하지만 고성은은 알았다. 반드시 끝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육정호는 감히 그녀의 눈물에 손도 대지 못하고 낮게 말했다. “N신의 눈물은 비싸. 아끼자. 옷 갈아입어, 이제 밥 먹으러 가야지. 이렇게 말라서야 무슨 일을 하겠어.” 고성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15분 뒤, 육정호와 고성은은 함께 내려왔다. 건물 앞에는 화려한 차량 행렬이 대기 중이었다. 육정호가 차 문을 열어 고성은과 나란히 탔다. 육정호는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좋았다. 그녀만 곁에 있으면 세상을 손에 넣은 듯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반 시간 뒤, 두 사람은 남영 클럽에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자 먼저 한 남자가 웃으며 인사했다. “성은 선배.” 고성은이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선배, 돌아온 걸 환영해요.” 익숙한 얼굴들에 고성은은 반가움이 번졌다. 그녀와 함께 연구했던 대학원 후배들이었다. “너희들 다 같이 돌아온 거야?” 봉준후가 다정히 고성은과 팔짱을 꼈다. “그동안 진짜 보고 싶었어요. 저희가 성은 선배를 만나고 싶다 하니까, 정호 선배가 데리고 와줬어요. 게다가 글로벌 의료 서밋도 준비해야 하잖아요.” 성민아도 팔짱을 끼며 달콤하게 웃었다. “맞아요. 선배만 있으면 저희 더는 소처럼 일 안 해도 되겠어요. 정호 선배는 저희한테 너무 엄격하거든요.” “그새 훨씬 여자다워졌네? 예전의 울보가 아니구나.” 고성은이 성민아의 볼을 살짝 집었다. 그때 육정호가 날카로운 시선을 한번 흘겼고, 봉준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았다. 아찔했다. “들어가자.” 육정호가 짧게 말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