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일행은 남영 클럽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영 클럽은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한편의 외진 자리에 있었지만, 덕분에 또 하나의 세상처럼 느껴졌다. 이곳에는 차가운 철근과 콘크리트 대신 작은 다리와 흐르는 강물, 정자와 누각이 어우러져 한 걸음마다 특별한 운치를 드러냈다.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는 이는 해청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손꼽히는 인물뿐이다. 오늘 밤, 그 얼굴들이 더욱 빛을 뿜었다.
고성은은 일행의 호위를 받으며 구불구불한 회랑을 지나 예약해 둔 룸으로 향했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흰색 드레스 차림인 고성은은 담백한 분위기로 주변의 소란과 대비되어 오히려 시선을 사로잡았다.
육정호는 그녀의 옆에서 반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걸었다. 가까우면서도 선을 지키는 동행이었다. 그의 눈가에는 온화한 웃음이 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그늘에서 박재현이 와인 잔을 들고 서 있었다. 깊은 눈동자는 차가운 못처럼 고성은의 가녀린 실루엣만을 꿰뚫었다.
‘고성은? 저 여자가 어떻게 육정호랑 같이 있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인파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정확히 포착했다. 틀림없었다. 법적으로 아직도 자신의 아내인 바로 그 여자였다.
시선은 두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다가 결국 룸 앞에서 멈췄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작은 틈이 생겨 있었다. 박재현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그 틈을 들여다보았다.
육정호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곁에는 두 여인이 자리했다. 한 명은 고성은이었다. 물같이 담백한 얼굴이 세상을 뒤흔드는 N신일 리 없다는 비웃음이 속에서 일었다. 다른 한 명은 더 어려 보였고, 눈가에 순진한 아부가 어렸다. 전설 속 그 인물일 가능성은 더욱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박재현의 시선은 고성은 옆에서 호방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던 젊은 남자에게로 꺾였다.
‘혹시 저 사람이 N신인가? N신이 고성은과 저렇게 친하다면, 왜 한 번도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불쾌감이 그의 속을 들쑤셨다.
마침 그때 고성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얘기한 뒤 홀로 회랑 끝 조용한 곳으로 걸어 나왔다.
“여보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한 힘이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세상이 빙글 도는 순간, 고성은은 뜨겁고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혔다. 술 냄새에 익숙한 차가운 향이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박재현이었다.
“고성은, 많이 컸네?”
남자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머리 위를 내리찍었다. 조롱과 분노가 가득했다.
“내가 알기로 우리 아직 이혼 안 했거든? 그런데 벌써 못 참고 다른 남자 찾으러 돌아다니냐?”
강철 같은 팔이 허리를 죄어들어 뼈가 으스러질 듯했다. 고성은은 쓰라린 통증 속에서도 힘껏 그의 가슴을 밀쳐 냈다.
“박재현, 너 미쳤어? 이거 놔!”
목소리는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그는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닿을 만큼 가까워지고, 눈동자에서는 분노와 질투, 그리고 자신도 깨닫지 못한 소유욕이 출렁였다.
“내가 미쳤다고?”
그가 피식 비웃었다.
“아내가 다른 남자랑 웃고 떠드는 걸 보고도 가만있으면 그게 더 웃기지.”
“박 대표님, 건망증도 심하시네요. 우리 지금 이혼 서류 진행 중인 거 잊으셨어요?”
고성은은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입가에는 비아냥이 섞인 냉소가 걸렸다.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아꼈는데?”
박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는 예전의 달콤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넌 알잖아. 그날 이후, 내가 너한테서 못 빠져나온다는 거.”
고성은은 순간 굳어 섰고, 뺨에는 붉은 기가 스며들었다.
‘이 사람,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진 거야?’
그녀의 심장은 아리고 부풀어 올랐다. 눈가에 맺힌 뜨거운 물방울이 어느새 손등을 적셨다.
“옛정이나 나누려고 나를 막아 세운 건 아니겠지?”
박재현은 고성은의 팔을 풀어 주며 예전처럼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
“너 육정호랑 친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 N신이 누군지도 알고 있지?”
박재현이 마침내 속내를 꺼냈다.
고성은은 비웃음이 비치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도 N신한테 관심이 있었구나. 아, 맞다. 박씨 가문이 의료 사업도 했었지.”
박재현은 농담을 섞을 마음이 없었다.
“N신이 누군지만 알려 줘. 그러면 이혼합의서 고쳐서 네 몫에 40억 더 얹어 주지.”
고성은은 팔짱을 낀 채 괴물을 구경하듯 그를 훑었다.
“N신과 손잡으면 그 상업 가치는 무궁무진하지. 그 값을 40억으로 환산하려고 하는 건 너무 쩨쩨한 거 아니야?”
처음으로 그녀의 욕심을 제대로 본 박재현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을 뻗어 고성은을 기둥에 밀치고 눈을 부릅떴다.
“얼마면 되는데?”
고성은은 힘껏 그를 밀어 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다음 달 의료 서밋에 오면 직접 보게 될 거야. N신이 지금은 사정상 움직일 수 없거든.”
박재현의 시선이 그녀의 또렷한 눈을 움켜쥐듯 붙잡았다.
“고성은, 네가 감히 날 거절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꽤 많아.”
고성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의 분노를 손쉽게 건드렸다. 박재현의 얼굴이 금세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고성은, 네가 누구 아내인지 잊지 마. 배성 그룹 창립 기념식에 할아버지가 꼭 너를 데려오라고 하셨어. 할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마.”
양복 깃을 정리하며 다시 군림자의 태도를 세운 그는 명령조로 말을 맺었다.
‘할아버지...’
고성은은 속으로 냉소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말이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완벽한 가식의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연극이라면 자신 있거든. 체면 구기지 않게 해줄게.”
말을 끝낸 고성은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의 격렬한 충돌이 없었다는 듯 말이다.
“더 볼일 없으면 먼저 들어갈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곧은 등을 세운 채 걸어갔다.
문이 닫혀 시야가 완전히 가려지자 박재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 핏줄이 불거졌다.
‘젠장! 왜 자꾸 저 여자 때문에 화가 나는 거지?’
그는 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이혼합의서, 일단 보류해. 기념식 끝나고 다시 보내.”
수화기 너머에서 임준기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서류를 회수하러 방향을 틀었다.
박재현이 룸으로 돌아왔을 때 걸음을 멈췄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최민우도, 강세린도 없었다. 음식과 술 냄새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강세린의 휴대폰 한 대만 외롭게 놓여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강한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세린아? 세린아!”
돌아오는 건 정적뿐이었다. 박재현의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지키던 정장의 경호원들이 긴장해 일어섰다.
“사람은?!”
박재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경호원들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찾아내!”
그가 낮게 포효했다.
“출입문 막고, 전 구역 다 뒤져!”
경호원들은 즉시 사방으로 흩어져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