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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식사를 마친 뒤 진유빈은 심초연을 끌고 노래방에 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열한 시였다. 불을 켜자 어두운 거실에 꼿꼿이 앉아 있던 기태풍의 모습에 심초연은 깜짝 놀랐다. 기태풍의 눈가는 벌겋게 충혈돼 있었고 목소리는 쉬어 있었으며 얼굴에는 극도의 피로와 초췌함이 서려 있었다. “초연아, 할 말이 있어.” 심초연은 서류 한 묶음을 꺼내 들었다. “나도 할 말이 있어. 먼저 서류부터 봐. 먼저 씻으러 갈 테니까 나와서 이야기하자.” 심초연이 자리를 뜨자 기주풍의 휴대폰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오늘 밤 형수님이 안 도와주면 우리 기 도련님은 200억을 날리게 생겼네.” “돈 잃는 건 문제도 아니야. 형수님이 이번엔 빚 갚아 주는 걸 거부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이지.” 기태풍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럴 리 없어. 두고 봐.” “정말 형수님을 아프리카에 십 년이나 더 둘 생각이야?” “사실 지난번에 진심을 떠볼 때도 3년이나 버틴 걸 보면 충분히 증명된 거 아니야?” 기태풍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기주풍은 재벌가 출신이었다. 심초연에게 말해 온 것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아무런 지원도, 뒷받침도 없는 창업 1세대가 아니었다. 출신을 숨긴 데에는 물론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첫사랑은 기태풍의 집안 배경을 알게 되자 온갖 방법으로 그를 유혹해 금기를 넘게 했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배가 불러온 채로 그의 부모님을 찾아가 20억 원의 낙태 비용과 입막음 돈을 요구했다. 돈 앞에서 드러난 그 뻔뻔한 얼굴은 낯설고도 섬뜩했다. 그때 기태풍은 처음으로 다정한 얼굴 아래에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때가 되면 살을 베어 피를 마시는 칼날 말이다. 이 일로 아버지는 그의 자기 통제력에 의문을 품고는 유학 계획까지 취소했다. 원래 기태풍이 도맡아야 했던 핵심 사업도 능력이 훨씬 못 미치는 동생에게 넘어갔다. 지금도 기태풍은 여전히 가문 내 핵심 위치로 완전히 복귀하지 못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기태풍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답장을 보냈다. “1년만 더 보내면 그땐 내가 직접 데려와서 진짜 신분을 알려 줄 거야. 그리고 우리 기씨 집안의 정식 여주인이 되는 거지.” “그럼 송미주는?” 누군가 묻자 옆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맞장구쳤다. “그것도 몰라? 아이 엄마도 없는데 태풍이 곁에 여자도 없고 하니까 누군가는 두 사람을 돌봐야 하잖아. 우리 기 도련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는 결국 형수님이야. 1년이면 충분히 송미주한테도 질렸을 테고. 다른 잡다한 여자들도 정리할 시간은 남아돌지.” “맞아, 태풍이는 현실적인 사람이야. 밖의 여자랑은 놀아도 되지만 진짜 결혼할 와이프는 형수님처럼 고학력의 여자가 아니면 안 돼.” “그러니까. 형수님은 얼굴도, 학력도, 능력도 다 되잖아. 집안 배경만 조금 약할 뿐이야. 그게 아니라면 태풍이 굳이 이렇게까지 진심을 시험하지 않았겠지. 송미주는 형수님의 발끝에도 못 미쳐.” 기태풍은 눈썹만 찡긋거릴 뿐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심초연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을 열자 그는 급히 휴대폰 화면을 껐다. “여보.” 기태풍은 수건을 받아 심초연의 머리를 닦아 주며 지극히 낮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에 큰 문제가 생겨서 빚을 또 20억이나 졌어.” 예전 같았으면 심초연은 안타까워하며 곧바로 말했을 것이다. “괜찮아, 내가 같이 갚아줄게.” 하지만 오늘의 심초연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될까...” 기태풍의 목소리는 연약했으며 끝없는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심초연의 얼굴은 차가웠다. “기태풍, 나 이제 돈 없어.” 기태풍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더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시 아프리카에 한 번만 더 가면...” “서류 봤어?” 심초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혼 서류야.” 기태풍의 얼굴에 순식간에 온갖 표정이 스쳐 갔다. 처음엔 놀라다가 마지막엔 곧 분노로 굳어졌다. “내가 가난해서 그래? 평생 절대 못 일어설 것 같아?” 기태풍은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심초연, 내가 널 잘못 봤어.” 기태풍은 외투를 집어 들고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심초연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닫히지 않은 아이 방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노란 불빛을 보고 집에 남았다. 심초연은 진유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갔어.” 곧바로 OK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레스토랑 지하 주차장에서 기태풍의 차를 봤을 때 진유빈은 아주 태연하게 자신이 늘 지니고 다니는 위치 추적기를 공유해 줬다. “상속 싸움이라는 게 원래 그래.” 심초연은 소리 없이 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깊이 잠든 아들의 얼굴은 심초연을 더 닮았지만 표정과 기운은 기태풍을 닮아 있었다. 부드러운 얼굴 아래에는 은근한 차가움이 스며 있었다. 심초연은 집을 떠나던 날을 아직도 기억했다. 아들은 울며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엄마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심초연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심초연이 아들에게 마음의 빚을 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전부 기태풍 때문이었다. 휴대폰의 진동과 함께 진유빈으로부터 차량 위치가 전송됐다. “네 싸구려 남편, 돈은 좀 있네.” 기태풍은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싼 고급 주택 단지로 향했다. 평당 가격이 천만 원부터 시작하고 모든 집이 백 평 이상인 대형 단독 주택이었다. 심초연은 그들이 5~6년을 모으고 또 어머니의 마지막 4천만 저축금까지 보태 겨우 산 방 세 개짜리 집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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