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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하예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최도경.” 최도경은 걸음을 멈추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여기로 찾아온 거야.” “무슨 일인데?” “서연이 일 말인데...” 하예원이 입을 열자마자 최도경이 말을 잘랐다. “그 일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난 신경 쓰지 않을 거니까. 너도 신경 꺼.” “하지만 서연이는 억울하게 당한 거잖아...” 최도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아주 많아. 그렇다고 내가 다 신경 써줄 수 없잖아. 안 그래?” 하예원은 남자의 차가운 태도에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다. “최도경,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그전까지 난 계속 네 아내라고.” 최도경은 의미를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하예원을 보았다. “그래서?” 하예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네가 날 도와준다면 이혼할 때... 위자료 받지 않을게. 재산분할도 포기할게. 몸만 나갈게.” “몸만 나가겠다고?” 최도경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하예원을 비웃었다. “하예원, 그동안 재산분할 받을 생각이었어?” 하예원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법에 이혼할 때 모든 재산은 부부의 공동재산이고 재산분할 해야 해.” 최도경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예원, 우리 결혼할 때 계약서에 분명 쓰지 않았나? 이혼하게 되면 넌 몸만 나가는 거라고. 최씨 가문에서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뭐?!” 하예원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예전의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왜 그딴 계약서에 사인한 거야!' 최도경은 하예원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긴 다리를 뻗어 하예원의 옆으로 지나가 버렸다. 하예원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있던 카드마저 예전 자신의 손에 망쳐졌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하예원은 크게 말했다. “이번만 도와줘. 그러면 이혼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할게. 하지만 도와주지 않겠다면...” 하예원은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말했다. “이혼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되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불륜녀가 되겠지!” 최도경은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하예원을 보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예원,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눈동자가 하예원을 보고 있었다. 분명 무심하게 하예원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예원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거의 본능적으로 최도경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하지만 노서연이 떠올라 다시 억지로 고개를 돌려 최도경을 보았다. “그렇다면?” 최도경은 가만히 하예원을 보았다. 그 칠흑 같은 눈동자를 한참 보고 있으니 영혼마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빤히 보기만 하는 최도경의 모습에 하예원은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하예원도 알고 있었다. 이혼을 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갑자기 안 하겠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건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이였다면 몰라고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니 최도경을 제외하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최도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해봐.” 이 말을 한 후 최도경은 바로 떠나버렸다. 최도경에게 이런 협박이 먹힐 리가 없었다. 하예원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서둘러 따라 나갔다. 그러나 회사 밖으로 나오자 최도경은 이미 시동을 건 채 떠나버린 후였다. ... 연이은 며칠 동안 최도경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후로 하예원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여러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노서연을 구해주기에는 무리였고 심지어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임씨 가문의 권력은 하늘을 찌르고 노서연이 임해성을 다치게 했으니 평범한 사람들은 노서연을 구출해주기가 어려웠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하예원은 또 병원으로 찾아갔다. 오늘로 벌써 사흘째 되었다. 어떻게든 김은희를 만나 설득하고 싶었지만 김은희를 만나는 건 물론이고 병실로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두 경호원이 하예원을 막으며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아 김은희의 뜻임이 분명했다. 병원에서 나온 하예원은 하는 수 없이 또 도원 그룹으로 찾아갔다. 노서연은 그녀가 깨어난 뒤로 유일하게 걱정해주며 보살펴준 사람이었던지라 어떤 대가를 치르던 반드시 노서연을 구해줄 생각이었다. 다시 도원 그룹으로 찾아왔을 때 로비의 두 직원은 하예원을 보고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예원도 두 사람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그저 로비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이힐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든 하예원은 익숙한 얼굴을 형체를 보게 되었다. 윤수아도 하예원을 발견했다. 혼자 로비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뭐죠?” 두 직원이 윤수아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며칠 전 하예원을 대했던 태도와 완전히 달랐으니까. “윤수아 씨, 저분은 대표님을 만나러 오신 거예요. 하지만 약속도 없이 찾아오신 거라 회사 규정상 저희도 들여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본인 입으로 대표님 아내분이시라고 하는데 대표님께 연락해도 받지 않으시더라고요...” 직원의 설명을 들은 윤수아는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내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가며 하예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 이게 누구야? 하예원 씨잖아? 어머, 내 정신 좀 봐. 말실수했네.” 윤수아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본인 입으로 도경 오빠 아내라고 했다면서? 그럼 사모님인데 왜 도경 오빠 만나러 올라가지 않고 여기 앉아 있는 거야?” 하예원은 추악하기 그지없는 윤수아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수아는 더 기고만장해졌다. “하예원, 내가 저번에 경고했지. 눈치 좀 키우라고. 자꾸 우리 도경 오빠한테 들러붙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쩜 한 번도 듣지 않는 거니? 그러니까 자꾸 망신을 당하는 거잖아. 쯧쯧...” 윤수아는 자신의 얼굴을 아주 약하게 때리며 약 올렸다. “얼굴이 뻔뻔해서 그런가? “ 하예원은 그런 윤수아를 싸늘한 눈빛으로 보았다. “노서연 그렇게 된 거. 네 짓이지?” 윤수아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래, 맞아. 그래서 뭐? 그렇게 된 사람이 네 비서가 아니라 너였어도 도경 오빠는 날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뭐가 떠오른 것인지 윤수아는 갑자기 꺄르르 웃어댔다. “아, 지난번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고 도경 오빠가 어땠는지 잊지는 않았지?” 하예원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차갑게 변했다. 윤수아는 일부러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직원에게 말했다. “어머, 오늘 갑자기 찾아오긴 했는데 약속 없어도 도경 오빠 만나러 올라가도 되죠?” 그러자 두 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윤수아 씨랑 저희 대표님이 얼마나 친한지 모두가 알고 있는데 약속이 뭐가 필요하겠어요? 얼른 올라가 보세요.” 윤수아는 직원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져 가소롭다는 듯이 하예원을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일부러 직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가끔 이상하리만큼 뻔뻔한 사람이 있어요. 도경 오빠한테 꼬리 치려는 거니까 절대 그런 여우를 들여보내서는 안 돼요.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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