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뚜... 뚜... 신호음이 들려왔지만 한참 지나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5분 후에 다시 걸어보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일부러 끊어버린 듯했다. 하예원은 최도경이 일 때문에 바쁜 줄 알고 더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저 반 시간을 더 기다렸다가 다시 최도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최도경은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최도경이 일부러 자신의 연락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심호흡한 뒤 하예원은 택시를 불러 도원 그룹에 있는 최도경을 찾아가기로 했다. 사실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노서연은 그녀가 병원에서 깨어난 후 유일하게 잘해준 사람이었던지라 노서연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예원은 노서연의 설명으로 자신이 예전에 재벌집 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3년 전의 하씨 가문은 세원시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망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쓴 일기를 읽어보면서 기사도 찾아보았지만 망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핸드폰 연락처를 뒤져보았지만 연락처는 고작 열 개였고 그중에 하 씨인 사람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최도경을 제외하고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도원 그룹으로 들어가자 로비 직원이 하예원을 막아섰다. 그중 한 명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하예원은 걸음을 멈추었다. “최도경 만나러 왔어요.” 두 직원은 최도경의 이름을 듣자마자 미소가 점차 옅어졌고 눈빛도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저희 대표님을 만나러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예원은 직원을 보며 말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그러자 다른 한 직원이 미간을 구겼다. “약속하고 오셨나요?” 당연히 약속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상황이 급했던 하예원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제가 누군지 몰라요? 전 최도경 아내 되는 사람이에요.” 직원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쪽을 모릅니다.” 그들은 최도경이 결혼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최도경의 아내를 만나본 적은 없었다. 물론 상류사회에서는 하예원의 얼굴이 퍼져 있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그들이 알 리는 없었다. 한 직원이 눈알을 굴리다가 말했다. “대표님께서는 약속 없이 찾아온 손님은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대표님 아내분이시라면 차라리 지금 대표님께 연락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저희도 회사 규정대로 일하는 거라 멋대로 들여보낼 수 없거든요.” 결국 하예원은 최도경에게 다시 전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뚜... 뚜... 최도경은 여전히 하예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음도 사라졌다. 두 직원의 표정이 바로 변했고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하예원을 보며 비웃었다. 그중 한 명은 하예원의 예쁜 얼굴을 보고서는 질투가 피어올라 비아냥대며 말했다. “하, 정말 웃겨 죽겠네. 정말로 사모님이라면 대표님께서 왜 전화를 안 받으시겠어요... 지금 저희를 앞에 두고 사기 치는 거죠?” “개나 소나 우리 대표님을 만날 수 있는 줄 아는가 보는데... 요즘 불여우들이 왜 이렇게 뻔뻔해진 거지?” “그러니까 말이에요. 뭐, 얼굴 좀 예쁘다고 믿고 나대나 봐요. 감히 우리 대표님한테 꼬리 치려고 하다니. 저런 인간 널리고 널렸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면서 사모님 사칭하던 사람은 없었는데.” 두 직원의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가까이에 있던 하예원은 전부 듣고 말았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예원은 자신이 최씨 가문 며느리인데도 이런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최도경과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도원 그룹의 직원들은 전부 그녀를 모르는 듯했다. “최도경이 지금 회사에 있어요?” 그러자 직원은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어머, 죄송하지만 회사 규정에 외부인에게는 대표님 일정을 알려드릴 수 없다고 되어 있거든요.” 옆에 있던 다른 직원도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 아내분이시라면서요? 그런데 왜 남편이 회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거죠?” 하예원은 자신을 비꼬는 두 직원을 보다가 몸을 돌려 로비 휴식 구역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두 직원은 이미 하예원을 그런 최도경에게 꼬리 치려고 찾아온 불여우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예원이 가지 않자 더는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그냥 빨리 가세요. 우리 대표님은 그쪽을 만나주지 않을 테니까.” “맞아요. 여기서 공기나 오염시키지 말고 가세요!” “계속 그렇게 버티면 보안 요원 부를 거예요!” “당장 나가요!” 하예원은 원래 두 직원을 무시하려고 했다. 회사 규정이 있다고 하니 더는 두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태도가 너무나도 거슬리지 않는가. 이미 직업 정신을 잃은 두 사람은 꼭 하예원에게 화풀이 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과 너무 달라진 두 사람의 태도에 하예원은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래도 최도경의 매력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았다. 하예원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이게 도원 그룹 직원이 손님한테 대하는 태도인가요?” 하예원은 핸드폰을 꺼내 두 직원의 얼굴을 영상으로 찍었다. “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거나 어느 언론사에 제보한다면 분명 화제가 되겠죠?” 하예원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사 제목은... ‘도원 그룹 로비 직원, 손님한테 화풀이. 직원의 인성 문제인가, 아니면 도원 그룹의 입사 조건인가.'라고 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기사화한다면 도원 그룹의 주가도 내려가지 않을까요?” 하예원이 핸드폰을 들며 촬영하자 두 직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금 더는 하예원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직원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손님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이 기사화된다면 도원 그룹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게 된다. 두 사람은 당연히 이 사태를 책임질 능력이 없었다. 두 사람은 당황하고 말았다. 도원 그룹만큼 월급을 많이 주고 복지도 좋은 곳이 없었다. 설령 그저 로비 직원이라고 해도 아무나 입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도원 그룹에서 오랫동안 일한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근자감이 생겨났고 초심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이번에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측 태도 문제 맞습니다. 그러니 영상은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 다른 한 직원도 해고당하고 싶지 않은지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 규정상 대표실로 들어가실 수는 없고 휴식 구역에서 앉아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하예원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사과도 했으니 핸드폰을 내려놓았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바깥은 점차 어두워졌다. 하예원은 혹시나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최도경이 내려왔을까 봐 하루종일 한 끼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자 두 직원은 하예원을 흘끗 보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짐을 챙겨 퇴근했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하예원은 점차 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로비에 울려 퍼졌다. 정신이 번쩍 든 하예원은 눈을 뜨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귀티가 흐르는 남자가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