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하예원은 최도경을 보았다.
“날 만나주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럼... 이렇게 찾아오는 수밖에 없잖아.”
최도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 안에서는 윤희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경아, 누가 왔어?”
하예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윤희설 씨, 입원했다고 들어서 병문안 왔어요.”
윤희설은 윤수아와 달리 생각을 거치고 말을 꺼냈다. 하예원의 목소리를 들은 윤희설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하예원 씨.”
예의가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정작 들어와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노서연의 일을 더는 미룰 수 없었던 하예원은 오늘 어떻게든 최도경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윤희설에게 말했다.
“윤희설 씨,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윤희설은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미안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 미안해요. 들어오라는 말씀을 안 드렸네요. 얼른 들어오세요.”
이내 잠깐 뜸을 들이다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최도경을 보며 말했다.
“도경아, 예원 씨 들어오게 해줘.”
최도경은 하예원을 빤히 보았다. 몇 초 뒤 길을 비켜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하예원은 이 모든 것이 아이러니했다. 분명 최도경의 아내는 그녀이고 최씨 가문의 며느리도 그녀인데 남편이라는 작자는 다른 여자의 말만 들으니 말이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큼 기이했다. 윤희설이 먼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크게 다친 건 아닌데 예원 씨가 걸음 하게 했네요.”
하예원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윤희설은 고개를 들어 옆에 우뚝 서 있는 최도경을 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경아, 너도 봤잖아. 나 이제 괜찮아... 예원 씨가 왔으니까 얼른 예원 씨랑 집으로 돌아가도 돼.”
윤희설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어딘가 조금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수아가 괜히 쓸데없이...”
“괜찮다고?”
최도경은 차갑게 말했다.
“그럼 말해 봐. 이 상태가 괜찮은 거면 대체 어떤 일을 당해야 너한테는 괜찮지 않은 건데?”
윤희설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 내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내 연예계가 어떤지 잘 몰랐어. 나도 장 감독님이 그렇게 나올 줄은...”
최도경은 시선을 돌려 따라 들어온 고진형을 보았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고진형은 하예원을 슬쩍 보고서는 보고했다.
“그 감독의 본명은 장택준이고 연예계에서 유명한 감독이었습니다. 윤희설 씨와 처음 만나는 거라 아마도 윤희설 씨가 신인인 줄 알고 그런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술을 마신 상태였으니 윤희설 씨에게 음흉한 마음이 생겼지만 윤희설 씨가 내리친 술병에 뇌진탕으로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택준 씨 배후에는 진흥 그룹이 있습...”
고진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도경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세원시에서 내 귀에 그 이름 들리지 않게 해.”
고진형은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최도경은 장택준이라는 사람을 업계에서 묻어버릴 생각이었다. 막 병실을 나서려던 때 최도경은 다시 고진형을 불렀다.
“잠깐.”
고진형은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신 겁니까?”
최도경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 쓰레기는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안 돼.”
이 말을 들은 고진형은 바로 알아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장택준의 행위는 범죄이니 바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예원은 머릿속에 이런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이성을 잃은 남자.'
마음만 먹으면 유명 감독이고 뭐고 쳐내는 건 일도 아니었고 설령 배후가 누가 있는지 알아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명실상부인 아내인데도 최도경과 대화하기가 힘들었고 겨우 쫓아다녀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최도경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고진형이 떠나고 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윤희설은 하예원을 흘끗 보다가 옆에 있는 최도경을 보았다.
“도경아, 난 정말로 괜찮아... 예원 씨가 이렇게 찾아온 건 분명 급한 일이 있는 걸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 봐.”
하예원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최도경이 떠나지 않는 이상 계속 병실에 남아 있겠다는 태도였다.
최도경은 몇 초간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럼 난 먼저 가볼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윤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최도경은 하예원을 보았다.
“가자.”
하예원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하예원 씨.”
문 쪽으로 다가간 순간 윤희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예원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불렀어요?”
윤희설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경이는 그냥 제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니까 하예원 씨가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오해하지 말라고... 그냥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라고?'
‘하, 어이가 없네.'
하예원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
하예원은 최도경을 따라 병원에서 나왔다. 최도경의 차가 바로 병원 앞에 세워져 있었고 하예원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최도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 앉아.”
하예원은 멈칫하고는 문을 닫고 뒤에 앉았다. 차는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었고 최도경은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익숙한 창밖의 풍경에 하예원이 갑자기 물었다.
“조수석은 그 여자를 위해 남겨두는 거야?”
하예원이 말한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최도경도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차 안의 분위기는 점차 싸늘하게 변해갔다. 대답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포기하려던 때 최도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하예원은 사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듣고 나니 다소 눈빛이 흔들리고 말았다. 빠르게 그녀는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아끼고 있는 거라면 왜 서둘러 이혼하지 않는 거야? 내 요구는 어렵지 않잖아. 그냥 노서연을 풀어만 주면...”
하예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도경이 차갑게 끊어버렸다.
“임해성은 임씨 가문의 외동아들이야. 우리 최씨 가문에서 연 연회에서 그런 일이 생겼는데 우리 가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봐주고 있어. 하예원, 그러니까 이 일에서 그만 신경 꺼. 자꾸 우리 가문에 폐를 끼치지 말고.”
“하지만 내가 서연이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정말로 감방에서 평생 지내게 될 거야...”
최도경의 대답은 무척이나 냉정했다.
“그러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인데.”
이 말은 하예원에게 날카로운 비수로 다가와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야 하예원은 다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럼 장택준은 왜 업계에서 묻어버리는 건데. 그 사람 뒤에 누가 있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 사람을 묻어버리는 건 안 두려워?”
하예원의 목소리에는 옅은 조롱이 담겨 있었다.
“최도경, 윤희설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넌 바로 나서서 윤희설 씨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처리하려고 했어. 근데 나는 매일 너한테 애원해도 들어주지 않지. 난 그냥 노서연이 경찰서에서 나올 수만 있게 해달라고 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