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최도경의 목소리는 유난히도 차갑게 들려왔다.
“하예원, 넌 왜 내가 고작 보잘것없는 네 비서에 힘을 들여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임씨 가문 눈 밖에 나면서까지 구해줄 가치가 있는 것 같아?”
‘보잘것없는 비서라고? 하지만 나한테는 엄청 소중한 사람이야.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윤희설이 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잖아.;
하예원은 남자의 완벽한 턱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최도경,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최도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곧 거절이었다.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하예원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예원은 그저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창밖만 보았다. 어차피 최도경에게 무릎 꿇고 빈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
다음 날, 하예원은 윤희설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실에는 윤수아가 있었고 윤희설에게 하예원에 관한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희설아, 너 그날 하예원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르지? 안색이 잔뜩 굳어져서 도원 그룹 로비에 있었는데 로비 직원이 하예원이 누군지 못 알아보더라고. 다들 도경 오빠한테 꼬리 치려고 온 여우로 알고 있었어... 하, 최씨 가문 며느리로 3년 동안 살았으면서 알아보는 직원이 한 명도 없다니.”
윤희설은 침대에 앉아 조용히 들으며 사과를 깎고 있었다. 긴 머리가 얼굴로 내려왔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사과를 깎았다.
“희설아, 이건 내가 들은 건데. 노서연이 임씨 가문을 건드려서 하예원이 계속 도경 오빠 쫓아다니고 있다고 하더라고. 노서연을 도와달라고. 근데 도경 오빠가 눈길조차 주지 않더라... 근데 어제 널 괴롭히던 장 감독 있잖아. 그 감독 배후에도 거물이 있었는데 도경 오빠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연예계에서 치워버렸다며? 지금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넌 이미 도경 오빠 여자니까 앞으로 널 괴롭히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윤수아는 아주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꼭 자기가 당사자인 것처럼.
“내가 보기엔 도경 오빠가 곧 하예원이랑 이혼할 것 같아.”
이 말을 들은 윤희설은 그제야 손을 멈추었다. 사과 껍질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과일 바구니를 든 하예원이 들어왔다.
“윤희설 씨, 몸은 좀 괜찮아요?”
윤수아는 하예원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변했다. 그러고는 무례하게 하예원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 질렀다.
“하예원, 네가 여길 왜 와?!”
하예원은 그런 윤수아를 무시한 채 윤희설에게 말했다.
“윤희설 씨, 둘이서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윤희설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설아, 저 여자는 어제 너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 알고 이러는 거야. 어제도 널 구하러 가려던 도경 오빠 붙잡고 시간을 끌더라고... 오늘 여기 온 것도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거야! 절대 호의는 아니니까 둘이서 얘기하지 마.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누가 알아? 저 과일 바구니에 뭘 숨기고 들어왔을지?”
윤희설은 미간을 구겼다.
“하예원 씨, 할 말이 있는 거라면 그냥 하면 되지 않나요?”
하예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최도경에 관한 일이에요.”
최도경의 이름을 들은 윤희설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윤수아에게 말했다.
“수아야, 자리 좀 비켜줘.”
윤수아의 표정이 변했다.
“안 돼. 희설아, 저 여자는 분명 너한테...”
윤희설은 윤수아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수아야, 나가줘.”
윤수아는 윤희설을 조금 두려워하고 있었던지라 얌전히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내 하예원을 노려보고는 씩씩대며 병실을 나갔다.
병실 문이 닫히고 윤수아는 병실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눈빛이 섬뜩해졌다. 이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몇 초 뒤 상대는 윤수아의 연락을 받았다. 상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수아는 아주 다급하면서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예원이 왔어요... 희설이가 어제 그런 일을 당해서 충격이 큰 상황이라 하예원을 밀쳐낼 수 없을 거예요... 도경 오빠, 얼른 와서 말려주세요!”
...
VIP 병실에 있는 윤희설은 하예원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이었다.
“그래서 하예원 씨, 할 말이라는 게... 뭔가요?”
하예원은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생신 연회에 있었던 일을 윤희설 씨도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서연이가 그 일 때문에 상해죄로 감방에 들어가게 생겼어요. 그래서 합의가 필요한 상황이에요.”
“그 일은 저도 들어서 대충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임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하예원 씨도 잘 알고 있잖아요. 노서연 씨의 일은 저도 도와드릴 수 없어요.”
윤희설은 하예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예원 씨, 저 말고 차라리 도경이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최씨 가문은 임씨 가문과 사이가 좋잖아요. 도경이가 나서주면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최도경은 절 도와줄 생각이 없어요.”
하예원의 눈빛이 담담해졌다.
“제가 서연이를 구하는 게 임씨 가문의 미움을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럴 가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럼 하예원 씨는 제가 도경이를 설득하길 바라는 건가요?”
하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윤희설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제가 말한다고 해도 도경이가 들어줄지는 장담할 수 없는걸요.”
하예원은 윤희설을 빤히 보았다.
“윤희설 씨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바로 최도경이랑 이혼할게요.”
윤희설은 멈칫했다. 다소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하예원을 보았다.
“도경이랑... 이혼하겠다고요?”
윤희설의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예전의 하예원이 얼마나 질척거리며 이혼을 거부했는지를.
하예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도경이도 동의했어요?”
하에원은 윤희설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네.”
윤희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긴 머리가 내려오면서 더는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예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두 사람이 억지로 헤어지게 된 거잖아요. 그 뒤로 윤희설 씨도 애인을 만들지 않았으니 전 아직도 최도경을 잊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지금에야 다시 이어질 기회가 생겼는데 이대로 놓치면 아쉽지 않겠어요?”
하예원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지금의 전 기억을 잃은 상태라 전처럼 질척거리며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언젠가 기억이 돌아올 거고 그때가 되면 다시 예전처럼 이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다시 두 사람 사이의 큰 걸림돌이 되겠죠... 그때가 된다면 윤희설 씨는 최도경과 결혼하기 힘들 거예요. 윤희설 씨는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눈앞에 놓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윤희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두 눈동자에는 복잡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나 보네요.”
이 말에 하예원은 순간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몇 초 뒤 정신이 들어 입을 열었다.
“윤희설 씨, 방금 제가 한 제안은...”
하예원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희설이 말을 잘랐다.
“미안해요, 하예원 씨.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네요.”
하예원은 다시 당황하고 말았다. 윤희설은 멍청한 윤수아와 달리 머리가 아주 좋았고 상황 파악하며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비록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하예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도경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눈앞에 두고 윤희설이 거절하고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최도경과 평생을 함께할 기회이지 않은가.
하예원이 따져 물으려던 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예원, 희설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