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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 설마 대비라도 하려고?” 하예원은 남자를 밀어냈다. “난 이만 가볼게. 다른 일이 있거든.” 하예원은 뒤에 맹수가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도망쳐버렸다. 매번 최도경과 대화를 할 때면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얼른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 최도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예원.” 하예원은 걸음을 멈추었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차가운 최도경의 목소리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희설이 찾아오지 마.” 그 말을 들은 하예원은 미간을 구기며 그제야 고개를 돌려 최도경을 보았다. “최도경, 설마 아직도 내가 네 애인을 괴롭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하예원은 몇 초간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는 둥 마는 둥 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냉담했다.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렸다. “앞으로 희설이 찾아와 괴롭히지 마.” 최도경은 계속 말을 이었다. “희설이가 피아노를 포기하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었으니까.” 하예원은 멈칫했다. 곧바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최도경을 보았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을 마친 최도경은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최도경,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최도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예원을 지나쳐가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차가웠고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예원은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래서 최도경이 날 절대 도와주지 않으려는 거야? 날 증오하는 이유도 예전에 그런 일이 있어서였고? 기억을 잃기 전... 난 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거지?' ... 사흘 뒤, 하예원은 또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이번은 임해성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었고 윤희설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었다. 단순히 다시 검진하기 위함이었다. 의사는 검진 결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예원 씨, 회복이 아주 잘 되고 있어요. 후유증도 없을 것 같아요.” 이내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하예원이 물었다. “선생님, 사고로 잃은 기억들이...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돌아오긴 하나요?” 의사는 하예원의 진료 기록을 펼쳐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의 뇌 구조는 아주 복잡해요.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사례도 아주 많죠. 시간이 조금 지나서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영원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래서... 정확히 언제 돌아오는지, 돌아올 수는 있긴 한 건지는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예원은 다소 실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의사는 하예원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하예원 씨가 기억을 되찾고자 한다면 지인이나, 친구, 가족들과 함께 자주 갔던 곳이라도 가서 그때 했던 일들을 해보면 도움이 조금 될 거예요.” 하예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고마워요, 선생님.” ... 연회장의 조명은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저녁 7시가 되자 하예원은 딱 맞춰 연회장 입구에 나타났다. 최도경이 이 연회에 참석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며칠 전에 다투긴 했지만... 결국 또 최도경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최도경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연회장 뒤편에 있는 정원에 와서 계속 찾아보았다. 정원에는 아주 커다란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물은 아주 깨끗했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빛을 내고 있었다. 수영장 주위로 사람들이 있었고 서서 대화를 나누거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하예원은 시선이 어느 한 남자에게로 갔다. 곧바로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최도경.” 최도경은 고개를 돌려 하예원을 보았다. 아주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최도경은 하예원이 왜 이곳에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 마치 이미 예상하기라도 하듯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하예원이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최도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불안하면서도 초조한 윤희설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어떡해요? 희설이가... 희설이가...” 전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매니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최도경은 결국 짜증스럽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뜸 들이지 말고.” 매니저는 곧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희설이가 촬영하다가 사고가 생겼어요. 누가 희설이를 계단에서 밀어서 다리를 다치게 되었어요. 곧바로 구급차를 부르긴 했는데 함께 촬영하는 다른 여배우가 지금 못 가게 막고 있어요... 촬영장도 지금 엄청 소란스럽고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연락했어요...” “알았어.” 전화를 끊은 후 최도경은 잔뜩 굳어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하예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최도경...” 하예원을 스쳐 지나갈 때 최도경은 잠깐 멈추긴 했지만 다시 빠르게 긴 다리를 뻗었다. 하예원은 따라가려고 했고 누군가 나타나 막아섰다. 곧이어 히스테리를 부리는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거기 서!” 하예원은 고개를 들었다. 윤수아가 그녀의 앞에 우뚝 서서 턱을 쳐든 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태도는 너무도 기고만장했다. 다만 하예원은 그저 윤수아를 흘끗 보기만 할 뿐 시선을 돌려 버렸고 가던 길을 계속 가려고 했다. 윤수아는 바로 다시 하예원의 앞을 막아서며 이를 빠득 갈았다. “뻔뻔한 불륜녀가 눈치도 없이 어딜 자꾸 따라가? 왜 자꾸 도경 오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냐고! 남자 없으면 죽기라도 하는 거야? 하, 세상에 너만큼 천박한 여자는 없을 거야!” 하예원은 키가 큰 편이었다. 원래부터 윤수아보다 컸고 거기에다 하이힐까지 신으니 윤수아와 머리 하나 차이가 났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윤수아의 기를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윤수아를 보는 하예원의 표정은 덤덤했다. “윤수아, 나랑 최도경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어. 합법적인 부부라고. 불륜녀가 뭔 뜻인지 알고서 말하는 거야? 불륜녀는 내가 아니라 유부남인 걸 알면서도 파리처럼 맴도는 여자한테 어울리는 말이야. 솔직히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조용히 접어.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히려 영광처럼 떠들고 다니더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하려고.” 하예원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어투로 말이다. 표정 또한 담담했다. 하지만 하예원이 한 말은 윤수아의 귀에 조롱으로 들려왔고 자신을 도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윤수아는 예전부터 자기 혼자 잘난 척하는 하예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을 마친 하예원은 더는 윤수아에게 눈길을 두지 않고 옆으로 지나쳐 가버렸다. 윤수아는 그런 하예원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표정이 확 일그러지고 눈동자에는 독기로 가득했다. 아무리 하예원이 싫어도 남자를 홀리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씨 가문이 망하기 전에 하예원은 재벌 2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재벌 2세로 손꼽혔으니까. 모든 남자의 로망이자 모든 여자들이 질투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하씨 가문이 망하고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을 거로 생각했지만 하예원은 최도경을 성공적으로 유혹하고 말았다. 최씨 가문의 며느리로 또다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었고 살면서 고생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대체 하예원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 질투에 휩싸인 윤수아는 점차 추악하게 변했고 갑자기 빠르게 걸음을 옮기더니 하예원을 수영장으로 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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