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풍덩.
거센 물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지금은 초겨울이었던지라 밤바람은 아주 차가웠다. 수영장의 물 또한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차가운 물이 사방으로 튀면서 하예원은 풍덩 파지게 되었고 마치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윤수아의 목소리가 차가운 물 위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아주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어머, 이렇게 추운 날에 갑자기 수영장에는 왜 뛰어든 거야? 수영이 그렇게 하고 싶었어?”
수영장의 깊이는 2m 정도 되었기에 발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하예원은 수영할 줄 알았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만 물이 너무도 차갑고 갑작스럽게 빠진 것이라 다리에 쥐가 나고 말았다. 수영 선수라고 해도 준비 운동도 없이 이렇게나 차가운 물에 갑작스럽게 뛰어들었다면 몸 어딘가에 쥐가 날 것이었고 심각할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랬으니 하예원은 어떻겠는가.
수영장 근처에 서 있던 윤수아는 독사처럼 사악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전부터 윤수아는 잘난 척하는 하예원이 비참해지는 모습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정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날도 추웠던지라 밖으로 나온 사람은 별로 없었고 하예원이 빠졌다는 걸 본 사람도 별로 없었다.
윤수아는 수영장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싸늘한 눈으로 허우적대는 하예원을 지켜보았다.
“하예원, 왜 아직도 허우적대는 거야? 설마 도경 오빠가 달려와서 구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꿈 깨. 도경 오빠는 희설이 구하러 갔으니까. 절대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하예원은 너무도 물이 너무도 차가워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긴 속눈썹도 파르르 떨리며 겨우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주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리에 쥐가 났어... 얼른 꺼내줘...”
꾸륵꾸륵.
고작 두 마디 했을 뿐인데 물이 입과 콧구멍으로 들어왔다. 지켜보던 윤수아는 몇 초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잔뜩 흥분해 악당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 기회에 제대로 괴롭혀줘야겠어!'
평소에 오만하기만 하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던 최씨 가문의 며느리 하예원이 자신의 발아래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니 윤수아는 즐거움에 잔뜩 흥분하고 말았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하예원을 보고서도 태연하게 핸드폰을 꺼내 영상으로 찍어 나중에 윤희설과 이 즐거움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영상을 세상에 공개해 세상 사람 모두가 물에 빠져 처참해진 하예원의 꼴을 보고 비웃게 할 생각이었다.
윤수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흥분되었고 핸드폰을 꺼내든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각도를 잘 잡은 후 윤수아는 핸드폰 화면에 나오고 있는 하예원을 보며 거만하게 물었다.
“하예원, 나더러 살려달라고?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윤수아는 음험하게 웃었다.
“안 그러면 그 안에서 익사하던가!”
하예원은 이미 수많은 물을 먹은 상태였다. 몸도 춥고 다리에 쥐가 났던지라 정신이 점차 흐릿해져 갔고 본능적으로 살려달라고 소리를 냈다. 윤수아는 그런 하예원을 보며 즐거운 듯 깔깔 웃어대기 바빴다.
“살려달라고? 그래. 살려줄게. 대신 애원해 봐. 애원하면 바로 꺼내줄게.”
하예원은 점차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하하하하!”
하예원이 살려달라고 할수록 윤수아는 더 즐겁게 웃어댔다. 너무 흥분해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뭐라고? 안 들려. 좀 크게 말해줄래? 하나도 안 들려. 아, 참.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봐. 나는 불륜녀 하예원이다. 윤수아 님,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평생 노예로 살면서 은혜를 갚을게요! 라고.”
윤수아의 목소리는 하예원의 귀에 악마의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윤수아는 여전히 즐거운 듯 깔깔 웃어댔고 표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하예원은 차가운 물 속에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느새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허우적댈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의지할 곳도 없었던 하예원은 천천히 깊은 수영장 바닥에 가라앉았다.
...
한편 최도경은 빠르게 달려 윤희설이 있는 촬영장으로 왔다. 촬영장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최도경은 그들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윤희설의 매니저 구나영은 최도경을 보자마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얼른 희설이 좀 살려주세요...”
구나영은 사람들 중 거만한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분이에요. 이름은 전한별이고 희설이랑 함께 촬영하게 된 배우인데 전부터 희설이한테 시비 걸고 트집 잡으면서 몇 번이나 촬영을 다시 해야 했어요. 방금은 전한별이 희설이 뺨을 때리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일부러 NG 내면서 희설이 얼굴 심하게 붓게 했고요... 희설이는 참고 있다가 결국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저 여자가 계단에서 희설이를 밀어버렸어요. 그것도 모자라 희설이더러 사과하라면서 사과하지 않으면 병원 안 보내주겠다고 협박했어요.”
인파 중에 있던 전한별은 구급차 앞을 가로막으며 거만하게 윤희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희설, 사과해. 사과하기 전까지 넌 아무 데도 못 가!”
윤희설은 처량하게 바닥에 쓰러져 앉아 있었다. 얼굴은 빨갛게 부어오른 상태였고 다리에는 어딘가에 긁혀 길게 찢어진 상처가 있었다.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보기 드물게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사과해요?”
전한별은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윤희설을 보았다.
“사과 안 하겠다고? 그럼 평생 거기 앉아 있어! 어차피 나에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누가 끝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고!”
윤희설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감독은 어찌할 바를 몰라 식은땀만 닦고 있었다. 나서서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다. 전한별은 투자자이기도 했고 그는 일개 인지도도 없는 감독이었던지라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인파를 밀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윤희설을 본 최도경이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감독은 최도경을 보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최, 최, 최 대표님...'
옆에 있던 전한별도 최도경을 발견하고는 남몰래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도경 오빠...”
전한별은 눈을 크게 뜨며 아주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최도경은 전한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멍하니 구경만 하는 구급대원에게 말했다.
“뭘 멍하니 서 있어요? 얼른 환자 이송 안 해요?”
의사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쓰러진 윤희설을 부축한 채 구급차에 태웠다. 이번에 전한별은 막아서지 않았다. 오히려 전한별은 아주 기쁜 표정을 지으며 최도경을 보았다.
“도경 오빠, 오랜만이에요. 정말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최도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최도경은 화면에 뜬 ‘하예원' 세 글자에 망설임도 없이 끊어버렸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또 걸려왔다. 요즘 들어 하예원이 그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는 지난 1년 동안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최도경은 차갑게 픽 웃고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