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복도는 아주 조용했다. 하예원과 최도경은 앞뒤로 걷고 있었다. 바닥에 길게 깔린 천 덕에 하예원이 하이힐을 신고 있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미간을 구긴 하예원은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키가 큰 남자가 자신의 등 뒤에서 걸으며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시선에 하예원은 묘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려 최도경을 보았다. 마침 남자의 칠흑 같은 눈동자와 눈 마주치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예뻐?”
하예원에게 들켜버린 최도경은 당황하기는커녕 여전히 대놓고 하예원을 보고 있었다. 너무도 담담한 최도경에서는 귀티와 우아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내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최도경의 말에 하예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아니라면서 왜 평생 여자 본 적도 없는 것처럼 날 빤히 보고 있는 건데?”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무시하는 눈빛, 악의가 가득 담긴 눈빛, 놀라운 눈빛 등 여러 가지 눈빛으로 하예원을 보고 있었지만 최도경처럼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돌아서서 최도경을 보았을 때 최도경의 눈빛에 언뜻 소유욕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다시 자세히 보았을 때 최도경의 눈빛은 호수처럼 담담하지 그지없었다. 최도경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오늘 왜 그렇게 입고 온 거지? 설마 일부러 관심받으려고 입었나?”
‘내 옷차림이 뭐 어떻다고?'
하예원은 최도경의 말에 절로 고개를 내려 드레스를 보았다. 레드와인색의 드레스는 아주 단정하고 예뻤고 오프숄더 디자인이라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을 예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요조숙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드레스를 입었을 때 노서연은 감탄하기도 했다.
“언니, 오늘 밤 연회장에서 언니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최도경은 하예원의 옷차림을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뭐지? 눈에 뭐 문제가 있나? 예쁘기만 한데.'
하예원은 쌀쌀맞은 어투로 말했다.
“아, 잊고 있었네. 당신의 안목이 남다르다는 거 잊고 있었어. 뭐 당신 눈에는 윤희설 자매가 제일 예쁘고 취향에도 잘 맞겠지. 근데 말이야. 내가 당신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아무리 급해도 며칠만 좀 참는 게 어때. 우리 아직 이혼 안 했잖아. 그런데 대놓고 윤희설 씨와 함께 오면 이미지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아, 그리고...”
하예원은 뭔가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윤희설 씨가 연예인이라고 들었거든? 만약 어느 언론사에서 사진이라도 찍어 기사화하면 윤희설 씨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당연히 망하겠지.”
그 말을 들은 최도경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 앞으로 몇 걸음 옮기자 커다란 그림자와 함께 위압감이 하예원을 덮쳐왔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하예원은 놀라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하예원은 뒷걸음질을 쳤다.
‘뭐야, 왜 이래? 이혼해주겠다고 했잖아. 난 그냥 조금 비꼬았을 뿐이라고. 애초에 타격 하나도 안 받는 사람이 갑자기... 왜 내 말에 화를 내는 것 같지? 설마... 내가 윤희설 연예인 생활을 들먹이면서 협박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하예원이 말을 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의 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 막히던 분위기도 바로 사라졌다. 백발이 성성한 집사가 나오며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들어가 보시지요.”
최도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긴 다리를 뻗어 방으로 들어갔다.
...
방 안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어딘가 기운이 넘쳐 보이는 어르신이 원목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르신은 최도경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도경아, 왔구나.”
최도경은 선물을 건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최성철은 웃으며 최도경이 건네는 선물을 받았다. 그러다가 최도경 뒤에 있는 하예원을 발견했을 때 웃음이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았다.
하예원도 선물을 건넸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장수하시길 바라요.”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최성철은 하예원이 건네는 선물을 받지 않았다. 그저 나이 들어 흐릿해진 눈빛으로 싸늘하게 하예원을 보기만 할 뿐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하예원의 손은 어색하게 허공에 멈춰있었다. 최도경을 흘끗 보며 자신을 위해 나서주길 바랐지만 최도경은 모른 척 태연하게 서 있기만 할 뿐이다. 심지어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예원은 남몰래 이를 빠득 갈았다.
최도경의 도움을 바라기엔 글렀다는 생각에 하예원은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그러자 최성철의 입에서는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네 선물은 받을 수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
하예원은 최성철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최성철마저 자신을 미워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
“할아버지, 혹시 제가 미우세요?”
최성철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하예원을 보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며느리가 저라서 싫으신 거예요?”
하예원은 최성철의 표정을 빤히 보며 관찰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최도경이랑 이혼할 거거든요.”
‘이혼'이라는 두 글자에 최성철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바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하예원을 보았다.
하예원도 최성철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고 물어보려던 순간 최성철은 갑자기 두 사람을 향해 손을 저었다.
“피곤하니까 이만들 나가보아라.”
최도경은 담담하게 방을 나섰다. 하예원은 제자리에 몇 초간 서 있다가 결국 나왔다.
최성철의 태도는 어딘가 다소 이상했다.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저 최도경과 결혼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방에서 나온 하예원이 노서연을 찾으러 가려던 때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가서 옷 갈아입어.”
하예원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최도경을 보며 싸늘하게 거부했다.
“싫어.”
그러자 최도경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갈아입어.”
하예원은 아예 못 들은 척 무시하며 가버리려고 했다. 최도경은 그런 하예원을 꽉 잡아버렸다. 하예원의 얼굴을 빤히 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갈아입으라고.”
“내가 뭘 입고 있든 뭔 상관인데?”
하예원의 말에 최도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 사이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어울려.”
‘안 어울린다고 무조건 갈아입어야 해? 하, 내가 왜? 예전의 나였으면 얌전히 갈아입었겠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하예원은 차갑게 최도경을 보며 손을 뿌리쳤다.
“미친놈.”
걸음을 옮기자마자 최도경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하예원, 마지막으로 말하지. 갈아입어.”
하예원은 고개를 돌리며 매혹적인 얼굴로 최도경을 보았다.
“내가 싫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