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하예원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곳에는 짙은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있었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자의 몸매는 아주 화끈했다. 미모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어딘가 손을 댄 듯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예원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그쪽은...”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노려보면서 대놓고 하예원을 무시했다.
“하, 또 연기하는 거야? 지겹지도 않아? 연기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나 봐?”
이때 입구에 있던 최도경이 시선을 돌려 연회 홀 한가운데에 있는 하예원을 보았다. 하예원은 윤기 도는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렸고 가느다랗고 하얀 목에 내추럴하게 몇 가닥 흘러내렸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보드라웠고 붉게 칠한 입술은 장미처럼 아름다웠다. 호수처럼 잠잠한 눈동자는 촉촉하면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다웠다.
최도경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고 하예원을 한참 빤히 보았다. 그런 최도경의 눈빛을 눈치챈 윤희설은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였다.
남자의 시선은 너무도 노골적이었고 하예원은 그가 보는 동시에 그 시선을 눈치챘다. 고개를 들자 차갑고도 위압감으로 가득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내 윤희설이 최도경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고 최도경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하예원이 느꼈던 위압감은 그제야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다가왔다.
“수아야.”
윤희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
조금 전까지 하예원을 비웃고 있던 여자가 윤희설의 말에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고개를 들자 윤수아는 잘생기고 키가 큰 남자를 보게 되었다. 순간 눈을 반짝이며 전과 다른 연약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도경 오빠.”
노서연은 작게 설명해 주었다.
“언니, 저 여자의 이름은 윤수아예요. 전에 언니가 수영장에 빠진 적 있었다고 했잖아요? 저 여자가 언니를 밀어버린 거예요.”
하예원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제야 여자가 당당하게 굴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윤수아는 윤희설의 사촌 동생이었던 것이다.
“하예원 씨.”
윤희설의 시선이 하예원의 얼굴에 멈추었고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저랑 도경이는 이 앞에서 만난 거예요. 우연히 만난 거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하예원은 그런 윤희설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희설은 하예원을 보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경이한테서 교통사고 당했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하예원은 그제야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이때 옆에 있던 윤수아가 살풋 웃으며 끼어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확실히 괜찮아 보이네. 근데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라고. 이번에는 부분 기억 상실이 아니라 전부 상실했나 봐. 아까는 나더러 누구냐고 그러더라고... 하하하, 나 정말 웃겨서 배꼽 빠지는 줄 알았잖아.”
“기억을 잃었다고?”
윤수아의 말에 윤희설은 고개를 돌려 하예원을 보면서 뜸을 들였다.
“하예원 씨, 정말로... 또 기억 잃은 거예요?”
윤희설의 태도는 윤수아보다는 나았지만 ‘또'라는 단어가 유난히도 거슬리게 들려왔다. 하예원 옆에 서 있던 노서연도 이상하게 귀에 거슬려 결국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고요!”
그러자 윤수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번에도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누가 믿겠어?”
윤수아의 시선은 이내 노서연에게로 향했고 대놓고 무시하는 눈빛으로 위아래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바로 비꼬았다.
“넌 또 누구야? 네가 끼어들 자격이 있기나 해? 하, 역시 끼리끼리 붙어 다닌다니까. 하예원 친구 답네. 무례하고 교양도 없는 걸 보니.”
노서연은 원래부터 의리 넘치는 성격이었고 또 다혈질이었던지라 윤수아의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터졌다. 막 윤수아의 말에 반박하려던 때 하예원이 말렸다.
하예원은 윤수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윤수아 씨가 맞는 말을 했네. 사람은 끼리끼리 노는 법이지. 불륜녀는... 당연히 불륜녀와 뭉쳐 다니는걸.”
그 말을 들은 윤수아는 꼬리 밟혀 하악질 해대는 고양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하예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하예원! 지금 누구더러 불륜녀라고 하는 거야?!”
하예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불륜녀라고 말했을 뿐이잖아. 윤수아 씨는 대체 왜 이렇게 흥분하고 있는 거지? 끼리끼리 논다는 말도 내가 한 게 아니라 네가 한 거 아닌가?”
이내 하예원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내가 한 말이 윤수아 씨 정곡이라도 찌른 건가? 그럼 다음부터는 미리 언질이라도 해줘. 그래야 정곡 찌르지 않게 조심할 수 있잖아.”
하예원의 위선적인 얼굴을 보니 윤수아는 정말이지 그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원래부터 불륜녀는 떳떳할 수 없는 존재였고 아무리 욕을 퍼부어도 이길 수 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하예원의 말을 부정한다면 강한 부정은 긍정으로 취급되어 윤수아는 불륜녀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할 말을 잃고만 윤수아는 패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예원, 이 년이 진짜...”
그때 윤희설이 윤수아의 말을 잘라버렸다.
“수아야, 하예원 씨도 그냥 홧김에 한 말일 거야. 다른 의미가 담긴 건 아니잖아.”
윤수아는 여전히 진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년이 먼저 나더러...”
윤희설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수아야, 그만해.”
윤수아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분노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상황이 변하자 노서연은 저도 모르게 하예원을 향해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언니야!'
노서연은 이미 불륜녀 자매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적반하장이니 정말이지 너무도 뻔뻔했다. 세상에 두 사람만큼 뻔뻔한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다만 하예원은 승리의 희열을 느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최도경이 여전히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쾌감이 든 하예원은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노서연에게 말했다.
“서연아, 나랑 화장실 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최도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곧 할아버지가 오실 거야.”
이 말은 하예원에게 한 것이었다. 예법에 따르면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하예원과 최도경은 먼저 최성철을 찾아가 축하 인사를 올려야 했다.
하예원은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예법은 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노서연에게 말했다.
“서연아, 난 할아버지께 인사하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기다려줘.”
뜸을 들이다가 또 말을 이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고.”
노서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니는 얼른 가봐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하예원은 그제야 최도경과 자리를 옮겼다.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윤수아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