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4화

임유아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눈앞에는 병원 천장이 보였고 코끝에는 소독약 냄새가 감돌았다. 임채아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배려 깊은 척 말했다. “언니, 의사 선생님께서 언니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대. 우진 오빠 너무 탓하지 마. 오빠도 다 나 때문에 그런 거야.” 겉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아도 실은 교묘한 도발과 비아냥거림이 가득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마주하자 임유아는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쌍둥이는 마음이 통한다고 했다. 어릴 적 습관부터 취미까지 똑같아서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심지어 남편까지 공유하게 되었다. 임유아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빼내어 창밖 풍경을 응시했다. 병실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천우진의 눈에는 약간의 안쓰러움이 스쳤다. 그는 자상하게 임채아를 일으켜 세웠다. 이어서 음침한 표정으로 임유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채아가 배려심 많아서 너한테 사과한 거야. 게다가 이번 일은 원래 네 잘못인데 과거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임유아는 실소를 터트리더니 전혀 물러서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영상에는 내 목소리만 나왔는데 그걸로 내가 했다고 단정 짓는 거야? 영상이 가짜일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수년간 함께하면서 이 남자는 그녀에게 일말의 믿음도 없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천우진은 입술을 달싹이고 눈가에 희미한 죄책감이 스쳤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임채아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그들이 떠난 후, 비자 신청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센터 직원은 임유아가 국내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여성이라며 비자 절차를 특별히 가속하여 다음 주 중으로 완료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일주일만 더 기다리면 그녀는 천우진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딱 일주일만 기다리면 된다. 이틀 뒤, 임유아는 홀로 퇴원했다. 천우진은 그녀에게 달랑 문자 한 통만 보내왔다. [채아가 연애하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대서 요 며칠은 함께 데이트도 하고 같이 시간 보낼 거야. 나 돌아갈 때까지 몸 잘 챙기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 문자를 보는 순간, 그녀는 거의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씁쓸함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웃음, 희미한 통증을 동반한 슬픈 웃음이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천우진은 사업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수백억대 프로젝트를 제쳐두고 달려왔었다. 그는 임유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우리 유아 생일도 함께해줄 뿐만 아니라 연인들이 하는 모든 걸 함께 해 볼 거야. 우리 유아가 남들 부러워하는 모습은 내가 견딜 수 없어.” 그는 약속을 지켰다. 사업이 더욱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간을 내서 임유아와 함께했다. 둘은 평범한 연인처럼 달달한 데이트를 즐겼다. 소원을 비는 나무 앞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마음을 맹세했지만 어느덧 그 맹세가 녹슬어 버렸다. 임채아가 올린 피드를 보니 천우진이 또다시 그 소원을 비는 나무 앞에 서 있었다. 다만 이제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임유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이고 몰려오는 고통에 휩싸이다가 마침내 밤이 깊어지자 감정을 추슬렀다. 침대 옆 협탁에서 앨범을 꺼내 둘만의 추억이 담긴 모든 것들을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렸다. 사진뿐만이 아니라 천우진이 해외까지 가서 그녀를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했던 반지 역시 망설임 없이 망치를 집어 들고 산산조각냈다. 임유아는 이 집 안에서 그들의 추억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버리거나 부쉈고 부술 수 없는 것은 모조리 태워버렸다. 배신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이 현실을 마주할 용기도 있었다. 한때 너무나 소중했던 기억들, 이제는 필요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늑했던 집안이 엉망진창인 잔해로 변했다. 마치 그녀와 천우진의 관계처럼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흘 뒤, 천우진이 갑자기 경호원 세 명을 보냈는데 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임유아를 강제로 끌고 갔다. 상황 파악이 됐을 때 그녀는 이미 병원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 간호사가 그녀에게 엄청 두꺼운 보호자 동의서 한 권을 건넸다. “문제없으면 이쪽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임유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서명을 해야 하죠?”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옆에 있던 경호원이 선뜻 나서서 설명했다. “임채아 씨가 데이트 중에 실수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어요. 천 대표님이 자신의 피부를 이식해주기로 했는데 유아 씨가 대표님의 국내 합법적인 부인으로서 반드시 서명하고 동의해주셔야 합니다.” 임유아는 ‘국내 합법적 부인’이란 수식어를 비꼬아야 할지 아니면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지 또 혹은 천우진이 임채아에게 보여주는 깊은 사랑에 감탄해야 할지 미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경호원의 재촉에 못 이겨 무거운 마음으로 [보호자] 란에 서명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