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소개
문지원은 꿈에서도 몰랐다.
이번 생에서 여진우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남자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집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라니.
한편, 훤칠한 키의 남자는 검은 가죽 소파에 기대고 앉아 긴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돌리고 심창호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을 때 마치 모든 걸 꿰뚫은 듯한 느긋하고 오만한 여유가 흘러넘쳤다.
낯익은 얼굴, 그리고 미소, 관능적인 빨간 입술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7년 전 생일에도 똑같이 웃음을 머금고 귓불을 깨물면서 욕망이 묻어난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정아, 넌 내 거야.”
그날 밤 남자는 몸소 성년식을 치러주었다.
오래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여진우가 알아보기 전에 당장 도망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때 심창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대표, 소개하지. 여긴 우리 손자의 여자친구 문지원 양일세.”
순간 문지원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 발은 옴짝달싹 못 했고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심창호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이내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차마 고개를 들어 마주 볼 용기가 안 나서 여진우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싸늘한 코웃음이 들려왔다.
“그렇군요.”
심창호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여자친구가 아니라 약혼녀지. 손자 녀석이 워낙 일편단심이라 예전부터 무조건 지원 양과 결혼하겠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거든.”
문지원 옆에 서 있던 심무영이 쑥스러운 듯 급히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지원 앞에서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곧 결혼할 텐데 뭘 그리 부끄러워해.”
심창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다시 여진우를 바라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참, 여 대표가 사람 보는 눈이 아주 정확하다고 하던데 오늘 마침 두 사람이 본가에 왔으니 우리 예비 손자며느리 좀 봐줘. 어때? 잘 어울리나?”
어떠냐니?
곧이어 또다시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느꼈다.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무심하게 울려 퍼졌다.
“별로네요.”
말을 마치자 그를 제외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고, 방 안에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여진우가 일부러 그녀를 난처하게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늘씬한 손가락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오늘 손자분이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날이니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그러고 나서 심창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쉽게 가버리다니?
문지원은 멍하니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심무영이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진우 씨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요즘 할아버지께서 부탁할 일이 있어 집으로 불렀을 뿐이야. 게다가... 우리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냥 못 들은 척해.”
“지원아?”
“응?”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문지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방금 프로젝트 계약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여진우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을 보자 심무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온종일 회사에서 시달린 것도 모자라? 얼른 밥 먹자. 오늘 할아버지가 직접 셰프까지 초대하셨어.”
“응.”
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저녁 식사 내내 문지원은 여진우를 다시 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방금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난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이 단 1초라도 머물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장난감이 생겼다는 뜻인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문지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긴, 벌써 5년 가까이 못 봤으니.
게다가 여진우처럼 무지막지한 욕구의 소유자는 여자 없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