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어딜 도망가?
저녁을 먹고 심무영은 직접 운전해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조수석에 앉은 문지원은 가는 내내 눈을 감고 차창에 기대 있었다. 마치 한바탕 싸움이라도 치른 듯 진이 빠졌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사라지는 순간 온몸이 탈진한 듯 나른했다.
“피곤해?”
심무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물었다.
“조금.”
문지원은 자세만 바꿨을 뿐 여전히 차장에 기대었다.
“소리 엔터테인먼트 투자 수익률을 계산해봤는데 나쁘지 않았어. 내일 회사 가면 한번 확인해 봐. 문제없으면 사업계획서 작성할게.”
“네가 괜찮다고 생각한 프로젝트를 반대할 이유가 없지. 다만 요즘 엔터 산업에 투자한 회사들이 성과가 별로였잖아. 우리도 신중해야 해.”
문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사전 작업이 중요한 만큼 수시로 확인할 거야. 문제 있으면 내가 직접 현장에 갈게.”
심무영이 미소를 지었다.
“고생이 많아.”
“그게 내 업무인데, 뭐.”
세명 그룹에서 때가 되면 월급을 받는지라 그에 걸맞은 일을 했을 뿐, 고생이 웬 말인가.
심무영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안주인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녀는 똑바로 앉더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무영 씨, 정말 나랑 결혼할 생각이야?”
심무영은 신호에 걸린 틈을 타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난...”
문지원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이 아니야.”
예전에 이미 여진우와 관계를 한 적이 있었다.
“알아. 네가 얘기했었잖아.”
“정말 괜찮겠어? 그 사람이 누군지 안 궁금해?”
그녀가 왜 갑자기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개의치 않고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럼! 궁금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 어차피 앞으로는 내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텐데.”
문지원이 입을 열려던 찰나 심무영은 조수석 쪽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지?”
“응.”
차는 문지원이 사는 아파트 건물 앞에 유유히 멈추어 섰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날이 어두워서 운전 조심해.”
심무영은 OK 사인을 보내며 피식 웃었다.
“얼른 가.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항상 선을 지키며 무리한 요구는커녕 늘 적당한 거리에서 배려해 주는 사람.
그래서 심무영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청혼을 수락했을 때 언젠가는 결혼해야 하고 계속 과거에 갇혀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심무영과 결혼하는 게 여러모로 가장 좋은 선택이다.
문지원은 한숨을 내쉬고 단지 입구로 걸어갔다.
하지만 복도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유 모를 답답함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연신 숨을 들이마셔 봤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문지원은 계단을 오르며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고 열쇠를 뒤적거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는 찰나, 문 앞에 묵묵히 서 있는 훤칠한 키의 남자를 발견했다.
‘여진우?’
키가 워낙 커서 어둠 속에 반쯤 가려졌고, 유독 번뜩거리는 눈동자는 마치 숲속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휘감으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내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발걸음을 옮기자마자 몸이 붕 떠오르더니 벽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다.
“아저씨...”
“어딜 도망가려고?”
여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피식 웃었다.
“문지원이라... 이름, 참 예쁘네. 나한테 얘기했던 ‘문소정’보다 훨씬 세련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