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사랑에 빠진 불도저

이 시간이면 문지원은 이미 퇴근했을 터였다. 여진우는 손끝까지 폈다가, 문득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볼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유를 원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결국 참기로 했다. ‘그래... 이제 겨우 스물다섯, 한창 세상 물정 모르고 신나게 놀 나이인데. 내버려두자.’ 그녀를 자신의 온실 안에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통제하고 속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진우가 스물다섯이었을 때는 오직 가문에 인정받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었다. 누가 조금이라도 무시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았고 ‘사생아’라는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그 의도가 뭐든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는 또래들이 누릴 법한 젊은 날의 쏠쏠한 즐거움 같은 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매일 긴장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문지원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여씨 가문을 진짜로 물려받았을지도 몰랐다. 그때 그는 미친 듯이 자기 세력을 넓히고, 여씨 가문 사람들에게 ‘너희가 무시하던 사생아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결국 자신은 아무한테도 함부로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여씨 가문을 맡는다는 건, 더는 자기 뜻대로만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함께 목숨 걸고 달려온 형제들만큼은 지켜야 했기에, 이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도 많아졌다. 이젠 여씨 가문 누구도 더는 여진우나 그의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니, 걱정도 예전만큼 크지 않았다. ‘이제는 내 회사도 있고 집에 돌아가면 소정이가 기다리고 밤에는 소정이의 허리를 감싸안고 몇 번이고 함께할 수 있고... 나중에 아이까지 생기면 이 집은 정말 완벽해질 거야.’ 여진우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신명준이 자신을 두고 한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에게 정착한다는 게 이런 거겠지. 사랑에 빠진 불도저가 된 것 같아.’ ... 이번에 진도운을 만났을 때, 그는 평소 회사에서 입는 딱딱한 정장이 아니라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층 더 어려 보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