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배유현은 은은한 불빛을 받은 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담배의 끝부분이 손가락 위에 떨어져 살이 조금씩 타들어 가는데도 그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벗어뒀던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일렁이는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콜이 와서 다시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먼저 갈게.”
말을 마친 후 그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룸을 떠났다.
노진수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따라가 봤지만 그는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룸으로 돌아오자 여자 동창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뭐라 얘기하는 것이 보였다.
“너희들 그 소문 못 들었어?”
“무슨 소문?”
“성다희랑 배유현이 대학교 때 3년이나 몰래 사귀었다는 소문 말이야.”
“뭐라고?”
친구들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신정연이 목소리를 높이며 눈을 부릅떴다.
“유현이가 성다희 그 뚱땡이랑 왜 사귀어? 주위에 여자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내 생각도 그래. 민지 너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만약 성다희가 정말 유현이랑 사귀었으면 완전 해외토픽감이지.”
그때 웬 남자 동창이 반박했다.
“유현이가 다희랑 사귄다는 게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는 얘기야? 솔직히 다희가 뚱뚱했던 건 맞지만 얼굴이 못생겼던 건 아니잖아. 피부도 깨끗하고 목소리도 좋고.”
“하긴 뚱뚱한 몸치고는 얼굴이 예쁘기는 했어.”
곽민지는 여자 동창들이 계속해서 불신의 눈빛을 보내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우리 언니도 같은 한성대여서 거짓말일 수가 없어. 정 믿기 힘들면 나중에 유현이한테 직접 물어보던가.”
물론 배유현에게 소문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성다희가 죽었다는 얘기는 뭐야? 그것도 사실인 거야?”
누군가의 질문에 신정연이 조금 팩한 말투로 답했다.
“사실이겠지. 배가 불룩한 모습까지 봤다며.”
“하긴, 만약 정말 살아있었으면 한 번 정도는 답장했을 거야.”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술을 마셨다.
...
룸에서 나온 배유현은 급하게 코너를 돌다가 그만 누군가와 부딪혀버리고 말았다.
부딪힌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 본능적으로 앞에 있는 무언가를 잡았다. 그러고는 중심을 잡은 후에야 자신이 잡고 있는 게 남자의 셔츠라는 것을 발견했다.
“죄, 죄송합니다.”
윤채원은 서둘러 사과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얼음처럼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배유현이었다.
‘세상이 원래 이렇게 좁았었나...?’
배유현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다시금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그는 머리가 상당히 복잡한 상태였기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윤채원은 배유현이 떠난 뒤에도 여전히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저 잠시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왔을 뿐인데 이곳에서 배유현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니 바닥에 셔츠 단추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윤채원은 단추를 주운 후 저도 모르게 배유현이 사라진 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단추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룸으로 들어갔다.
‘이게 맞아.’
...
집으로 돌아온 윤채원은 샤워한 후 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단추를 보며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배유현은 7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취향이 한결같았다. 그는 대학생 때부터 늘 이 브랜드의 셔츠만 입었었다. 그래서 윤채원은 셔츠 단추만 봐도 어떤 브랜드인지 맞힐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윤채원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외할머니였다.
“네, 할머니.”
“다희야, 왜 또 돈을 보냈어? 나는 필요 없다니까. 집에만 있는데 돈을 쓸 일이 뭐가 있어.”
외할머니의 목소리에 윤채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할머니가 대신 잠깐 맡아주는 거로 하세요.”
사실 윤채원은 딸이 개학하기 전 외할머니 댁에 한 번 다녀오려고 했었다. 그녀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은 딸을 제외하고 외할머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워낙 많다 보니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다.
“다희야, 네 외삼촌 말이다. 며칠 전에 집으로 왔다가 너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더라. 다희야, 그래도 삼촌이잖아.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윤채원은 외삼촌이라는 말에 표정을 살짝 굳혔다.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녀가 아직 아기일 때 남편과 이혼하고 집을 떠나버렸으니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녀의 어머니는 끝까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도박꾼이라 줄곧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기만 했다. 가끔 돈을 따면 그녀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곤 했지만 나중에는 아예 그녀를 외할머니 댁에 내팽개친 채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채원에게는 그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친부모나 마찬가지였다.
“네, 무슨 뜻인지 알아요.”
윤채원은 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했지 외삼촌네와 다시 연락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윤채원은 셔츠 단추를 밀봉 팩에 넣은 후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월요일.
윤채원은 딸과 함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도 행여 저번처럼 배유현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까 봐 그녀는 일부러 화요일이 아닌 월요일에 왔다.
배유현이 외래 진료를 보는 날은 화요일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월요일이라 그런지 환자들이 평소보다 더 많았다.
윤채원은 딸의 손을 잡은 채 마스크를 조금 더 위로 올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러고는 3층에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짧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윤채원은 저도 모르게 딸의 손을 꽉 말아쥐었다. 바로 뒤에서 배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윤채원은 곧장 6번 진료실로 향했고 배유현은 8번 진료실로 들어갔다.
“엄마, 손에 땀이 가득해요.”
윤아린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녀의 손을 한번 흔들었다.
아이의 말에 윤채원은 천천히 손을 풀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정말 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배유현이 근처에 있으면 그녀는 늘 이렇게 긴장이 되었다. 배유현이 자신을 알아볼 리가 없다는 것 따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 반응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윤채원은 일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어젯밤에 주웠던 셔츠 단추를 간호사스테이션에 몰래 내려놓았다.
...
그날 저녁.
윤채원은 남은 업무를 마친 후 딸의 방으로 향했다.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쌔근쌔근 자고 있는 딸의 모습은 정말 배유현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이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준 다음 그녀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여자는 매우 말라 있었고 피부가 희며 입술은 도톰했다. 이 얼굴이 7년 전의 그 뚱뚱한 여학생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니 한때 성다희를 알고 있던 사람과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다 해도 숨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못 알아볼 테니까.
...
그 시각, 배유현은 자신의 집이 아닌 배씨 가문 본가에 찾아왔다.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고 있던 그때, 배갑수가 갑자기 수저를 놓으며 자기 부인인 박영란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박영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배유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배갑수 사이에는 총 네 명의 자식들이 있다.
첫째는 배도겸으로 입양한 아들이다. 입양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결혼한 지 이제 막 1년 정도 됐을 때 친구 부부가 비행기 사고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친구 부부의 아들이 바로 송도겸이었고 입양된 후 배도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둘째는 박영란이 33살 때 처음으로 임신한 딸인 배유진이다. 배유진은 현재 배도겸과 함께 배진 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셋째와 넷째는 박영란이 45살 때 어렵게 얻은 쌍둥이로 형의 이름은 배유승이고 동생 이름은 배유현이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배유승은 20년 전의 유괴 사건으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무사히 품으로 돌아온 건 막내아들인 배유현뿐이었다.
박영란은 지금도 여전히 배유승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나왔다.
하지만 오늘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목을 가다듬었다.
배유현은 어릴 때부터 그녀의 속 한번 썩인 적 없는 자랑스러운 아들임이 분명했지만 멀쩡하고 잘생긴 얼굴로 이제껏 집에 여자 한번 소개해 주지 않았다.
28살이나 먹었는데도 전과 다를 바 하나 없으니 박영란으로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벌써 70대가 되어버린 자신의 나이도 신경 쓰였고 말이다.
“유현이 너, 수요일에 시연이랑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안 나갔다며?”
“네.”
박영란이 미간을 주물렀다.
“시연이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예쁘고, 착하고, 또 일도 잘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도씨 가문 어르신이랑 네 할아버지가 전우인 거 너도 잘 알잖아.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휴, 유현이 너도 곧 서른 살이야. 이제는 결혼 생각할 나이가 됐다고.”
배유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수저를 내려놓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어요. 그럼 엄마가 다시 약속 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