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윤채원은 딸의 손을 꽉 잡고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아린은 착한 어린이답게 고개를 돌려 배유현을 향해 손을 휘휘 젓는 걸 잊지 않았다.
“저 꼬맹이 혹시 배 선생님 친척 동생이에요? 둘이 많이 닮았던데. 친딸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동료 의사가 배유현 쪽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나와 닮았다고요?”
배유현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윤채원과 아이는 이미 엘리베이터에 들어가고 없었다.
만약 그에게 윤아린만큼 큰딸이 있었으면 박영란은 지금쯤 입이 귀에 걸린 채 잔치를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배유현은 이상한 곳으로 튀어버린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야 말도 안 되는 얘기였으니까.
다만 예쁘게 생긴 아이이기는 했다. 자꾸 눈이 갈 만큼.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아린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감자가 아직 그 의사 선생님 차에 있어요.”
“감자?”
윤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가 금방 딸이 말한 감자가 노란색 강아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까 차도에서의 상황이 다시 떠오르자 진지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윤아린,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위험한 짓 하지 마. 알겠어?”
“아린이는 선생님 차에 치인 게 아니라 깜짝 놀라서 그저 넘어진 것뿐이에요. 그리고 선생님도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않았어요.”
“엄마는 아린이가 갑자기 차도에 뛰어드는 행동이 잘못됐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위험하잖아. 다시는 그러지 마.”
“네, 알겠어요.”
윤채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그래서 감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빠랑 엄청 닮은 그 선생님한테 돌려달라고 할 거예요?”
“아린아, 의사 선생님이 아빠랑 닮았다는 얘기는 앞으로 하지 마. 만약 의사 선생님이 그 말을 듣게 되면... 매우 기분 나빠할 거야.”
윤채원은 마음이 조급해 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 다행히 윤아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라도 하듯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채원은 잔뜩 엉킨 실타래가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 실타래가 점점 더 엉켜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배유현에게 강아지를 돌려달라는 얘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배유현과 또다시 마주치기도 싫을뿐더러 설사 돌려받았다고 한들 집에서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강아지는 배유현이 알아서 입양처를 찾아주든 할 거야. 아마도...’
윤채원은 자신이 생각하고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배유현은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예전에 그녀가 떠돌이 개를 안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날이 따뜻해질 때까지만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안된다며 거절했다.
배유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것들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잠자리할 때는 그 딱딱한 표정이 조금 풀어지고는 했지만 끝나고 나면 금방 다시 돌아왔다.
“아린아, 나중에 아린이 몸이 좋아지면 그때 다시 강아지 키우는 거로 하면 안 될까? 그때는 지금보다 더 큰 집에서 살 수도 있어. 엄마가 돈을 많이 벌어놓을 거거든. 어때?”
“하지만 그건 감자가 아니잖아요...”
속상함이 가득 담긴 아이의 목소리에 윤채원은 가슴이 다 저려나는 것 같았다.
저녁 9시.
윤채원은 샤워를 마친 후 딸이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윤아린은 낮에 봤던 강아지가 눈에 밟히는지 그림에도 노란색 강아지를 그려 넣었다.
그걸 본 윤채원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명함을 꺼내 들었다. 강아지를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번호를 눌러갔다.
지난 7년 동안 윤채원이 배유현에게 전화를 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녀가 과다 출혈로 몸이 잔뜩 허약해진 채 병상에 누워있을 때였다. 저녁 늦게 배유현에게 전화를 걸자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윤채원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윤채원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베란다로 나가 문을 살짝 닫았다. 그러고는 거실에 있는 딸을 바라보며 배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신호음이 간 후 전화가 연결되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배유현의 목소리가 아닌 여자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유현이 찾아요?”
윤채원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버렸다. 목구멍에 뭐가 막히기라도 한 것인지 좀처럼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다시금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채원은 목을 가다듬은 후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잘 못 걸었어요.”
“잘못 건 거 아니에요. 유현이 찾는 거 맞죠? 지금 샤워하고 있으니까 이따 전화하라고 할게요.”
전화를 먼저 끊은 건 윤채원이었다.
윤채원은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 베란다 난간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늦은 시간에 여자가 곁에 있다는 건 여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배유현은 늘 주위가 여자로 들끓었으니까.
윤채원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신 후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알고 있다. 배유현의 세계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7년 전에도 지금도 두 사람은 여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배유현은 어쩌면 성다희가 세상에서 사라진 그날, 그녀에 관한 것들을 전부 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다희와 연애했던 3년을 치욕스러운 3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녀와 연애했던 것도 배소영 일로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아서였으니까.
윤채원은 생각을 그만하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저혈당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증상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고 얼마 안 돼 바로 살을 빼기 시작했고 그러다 저혈당이라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증상을 달고 살게 되었다.
피곤하거나 지나치게 긴장하면 늘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윤채원은 시선을 내려 발신자를 확인했다. 배유현의 번호였다.
그녀는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5초가 넘어갈 때쯤 전화를 받았다.
배씨 가문 저택.
막 샤워를 마친 후 나온 배유현은 러그 위에서 우유를 마시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전화를 걸었다.
강아지가 코를 박은 채 먹고 있는 바람에 그릇이 쏟아지려고 하자 그는 강아지의 목 뒷덜미를 확 잡아 올렸다.
그때 전화가 연결되고 배유현은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네, 배유현입니다. 누구시죠?”
소파에 앉아 있던 배유진은 동생의 거친 손길에 미간을 찌푸리며 옆으로 다가왔다.
“살살 좀 해. 왜 이렇게 거칠어?”
그녀는 배유현의 손에서 강아지를 홱 뺏어오고는 자신의 품에 안아 들었다.
윤채원은 또다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하려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배유현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지고 있는 와중에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보세요? 얘기하세요.”
배유현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환자로부터 걸려 온 전화일지도 모르기에 일을 시작한 뒤로 늘 인내심을 가지고 전화를 받게 되었다.
“저예요, 선생님. 딸이 강아지를 찾고 있어서요. 혹시 선생님께서 데리고 계신가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에 배유현은 순간 흠칫했다. 최근 성다희 생각에 반쯤 미쳐있어서인지 아주 잠깐이지만 성다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 저희 집에 있어요.”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딸이 강아지를 너무 좋아해서 돌려받고 싶은데...”
“다음 주에 보는 거로 하죠. 내일 아침 일찍 서안시로 출발해야 하거든요. 돌아오면 제가 먼저 연락드리죠.”
“네, 알겠어요.”
윤채원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배유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연락처에 저장하려고요.”
“윤채원이에요.”
“윤채연이요?”
배유현이 되물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배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채원이라잖아. 귀가 막히기라도 한 거야?”
윤채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핀잔을 주는 여자의 목소리에 가슴이 움찔 떨렸다. 눈치 같은 건 보지 않아도 될 환경에서 자란 귀한 집 따님이 틀림없었다.
윤채원은 어쩐지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 같아 먼저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