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윤채원은 그제야 배유현과 통화한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전 그녀는 강아지를 키우는 것에 관해 진정숙과 얘기를 나눴다. 당연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 진정숙은 예상외로 흔쾌히 허락했다. 넓은 베란다도 있어 키우기 편할 거라며 편히 데려오라고 했다.
그 말에 윤채원은 한시름 덜었다. 다만 강아지 교육은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예쁜 강아지라도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면 주민들은 물론이고 진정숙도 더 이상 환영하지 않을 테니까.
윤채원은 우동을 먹으며 배유현과의 통화 내용을 다시 되뇌어보았다. 여자 친구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사실 여자 친구 없다 해도 그와 엮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진료받을 때도 계속 다른 의사에게서 진료받을 생각이었고 말이다.
이렇게 계속 피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유림은 심각해 보이는 윤채원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내일 시간 돼요? 동물보호센터로 가서 강아지를 입양해 오고 싶은데.”
“당연히 되죠. 내일 오전 9시에 픽업하러 갈게요.”
다음날.
서유림은 약속대로 정확히 9시에 맞춰 윤채원의 집 앞에 도착했다.
윤채원이 차에 올라탄 후 차량은 동물보호센터로 향했다.
동물보호센터.
안에는 예쁜 강아지들이 매우 많았다. 이제 막 태어난 강아지들도 있어 윤채원이 그쪽으로 가보려는데 웬 털 뭉치 하나가 그녀의 손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윤채원은 똘망한 강아지의 눈빛을 바라보며 더 볼 필요도 없이 이 아이가 바로 우리 집에 입양될 아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윤채원은 곧장 강아지를 데리고 딸의 방으로 향했다.
윤아린은 강아지를 보고 매우 기뻐했지만 그때 구해줬던 강아지가 아니라는 것에 아주 잠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윤채원은 그런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린이는 어떤 이름이 좋을 것 같아?”
“음...”
윤아린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코코’라고 답했다.
앙증맞고 귀여운 것이 강아지와 딱이었다.
코코는 생각보다 더 빨리 집에 적응했고 산책도 곧잘 하며 잠도 잘 잤다. 다만 아직 새끼 강아지라 그런지 자꾸 윤채원의 실내화에 기어들어 가 잠을 청했다.
그래서 윤채원은 아침에 일어난 후 꼭 실내화를 한번 체크했다. 행여라도 밟아버리면 안 되니까.
배유현은 전시회 날 이후 윤채원에게 별다른 연락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윤채원도 슬슬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서유림이 갑자기 배를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채원 씨 혹시 점심에 시간 돼요? 생리 때문에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채원 씨가 나 대신 팀장님이 맡긴 도시락을 병원에 가져다주면 안 될까요? 팀장님 남자 친구한테 전해주면 돼요.”
윤채원은 통증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서유림을 보며 얼른 알겠다고 했다.
서유림은 도시연의 비서라 평소 이와 같은 잡다한 일을 많이 하곤 했다.
윤채원은 도시락을 들고 병원에 도착한 후 서유림이 보내온 주소에 따라 흉부외과 2번 진료실로 향했다.
문이 열려있어 슬쩍 안을 바라보니 웬 남자 의사가 진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남자 의자의 얼굴이 매우 낯이 익었다.
‘배유현...? 팀장님의 남자 친구가 배유현이었다고?’
배유현은 햇빛을 받은 채 담담한 얼굴로 환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채원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도시락만 내려놓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배유현이 갑자기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지나치게 놀란 얼굴의 그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마지막 환자까지 나간 후 진료실 안은 윤채원과 배유현, 이렇게 둘만 남게 되었다.
윤채원은 마음을 한번 가다듬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배유현의 책상 위에 도시락통을 내려놓았다.
“이건 배 선생님 여자 친구이신 도 팀장님께서 보낸 도시락이에요. 따뜻할 때 드세요.”
윤채원은 마치 게임 NPC처럼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차가움이 조금 깃든 듯한 배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몰랐는데.”
“도시연 팀장님이요. 최근에 남자 친구분을 사귀었다는 얘기가 회사에 널리 퍼졌어요.”
윤채원은 답을 해주며 그와 통화했을 때 들었던 여자 목소리를 떠올렸다.
‘설마 그게 도 팀장이었나?’
“아무튼 저는 도시락을 전달해 드렸으니 이만 가볼게요.”
윤채원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발을 앞으로 디디려던 찰나 갑자기 배유현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중심을 잃고만 윤채원은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겨버렸고 배유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녀의 말랑한 아랫입술을 살짝 눌렀다.
“아린이 어머니... 아니, 윤채원 씨, 잠깐 나 좀 도와주시죠.”
배유현은 진료실로 걸어오는 누군가를 힐끔 바라보더니 윤채원의 허리를 조금 더 세게 잡아당기며 그녀를 아예 자신의 무릎에 앉혀버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꺾으며 윤채원의 얼굴 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이 내려앉은 곳은 다행히도 그의 엄지손가락 위였다. 하지만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윤채원은 온몸이 다 얼어붙은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코가 서로 맞닿고 숨결도 한데 엉켜버렸다.
윤채원은 그의 체향에 온몸이 다 마비된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울리는 머릿속 경고음에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가슴을 밀었는데 배유현은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 더 세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거리를 좁혀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진료실 문 쪽에서 여자의 앙칼진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윤채원은 정신을 번쩍 정신을 차렸고 배유현은 얼굴을 살짝 뒤로 뺀 후 윤채원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
“보면 몰라? 방해되니까 나가.”
“겨우 저딴 여자 때문에 나를 거절한 거였어? 저 여자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데! 가문으로 보나 뭐로 보나 내가 더 오빠한테 잘 어울리는 여자잖아!”
배유현은 기다란 손으로 윤채원의 등을 쓰다듬더니 아까보다 확연히 차가워진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나가.”
오수빈은 배유현에게 안겨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할 수만 있다면 여자의 등판에 칼이라도 꽂고 싶었다.
윤채원은 오수빈이 씩씩거리며 진료실을 나간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배유현의 눈을 보며 그녀는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게 관심 있는 여자의 마음을 식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아마 오수빈은 두 사람이 키스했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실상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찰싹 붙어있었던 건 맞다. 그것도 서로의 심장 소리가 다 들릴 만큼...
“내 품이 생각보다 더 아늑했던 모양입니다?”
배유현이 피식 웃으며 윤채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