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같이 놀자고.”
서강준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며 차에서 내리게 했다.
“왜, 겁나?”
룸 안은 은은하고 흐릿한 조명 아래 공기마저 달아올라 있었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한미주가 중앙에 앉아 있었고 그들이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일어나 서강준의 팔짱을 끼었다.
“강준아, 왜 이제야 왔어? 다들 게임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걸.”
“자, 게임하자!”
한미주의 친구들이 바로 장단을 맞췄다.
“진 사람은 벌칙이 있어야지.”
게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필이면 서강준과 한미주가 졌다.
“러브샷! 반드시 해야 해!”
친구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외쳤다.
한미주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술잔을 들며 수줍게 웃었고 서강준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임지안 쪽으로 흘깃 시선을 보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한미주의 팔을 감싸며 잔을 부딪쳤다.
다음 판에서도 그 둘이 졌다.
또 다른 친구가 카드를 펼쳐 들었다.
“이번 벌칙은 훨씬 자극적이야. 5분간 입맞춤!”
룸 안은 비명과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서강준은 아무 말 없이 한미주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입을 맞췄다.
“마지막 벌칙! 안고 세 바퀴 돌기!”
그는 가뿐하게 한미주를 들어 올려 모두의 환호와 웃음 속에서 그녀를 안은 채 세 바퀴를 돌았다.
흰색 드레스 자락이 공중에서 흩날렸고 한미주는 그의 목에 매달린 채 꽃처럼 웃어 보였다.
임지안은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서강준이 간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시선은 마치 그녀가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눈빛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물 한 모금을 삼켰을 뿐이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다만 미세하게 찡그릴 뿐이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일어서는 임지안의 치맛자락이 서강준의 무릎을 스쳤다.
화장실에서 임지안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거울 속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문을 열자마자 한미주가 문 앞을 막아섰다.
“꽤 담담한 척하네?”
그녀는 갓 손질한 네일을 만지작거리며 비웃었다.
“강준이가 오늘은 당신한테 망신 주는 날이라던데.”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임지안은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아직도 당신이 사모님인 줄 알아?”
한미주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강준이가 나한테 말했어. 당신을 결혼 상대로 택한 이유는 복수 때문이라고.”
그녀가 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비록 대역에 불과하지만 머지않아 당신 언니 자리를 대신하게 될 거야.”
임지안이 그녀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건 참겠지만 너 따위가 뭐라고 가당키나 해?”
“너!”
한미주가 분노로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복도 쪽에서 다가오는 서강준의 모습이 보이자 순식간에 얼굴빛이 변하며 손을 놓고 스스로 뒤로 젖혔다.
“꺅!”
비명이 터졌고 한미주는 뒤로 넘어지며 이마를 세게 부딪쳤고 피가 흘러내렸다.
서강준이 뛰어 들어왔을 때 한미주는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준아, 지안 씨를 탓하지 마. 오늘 당신이 나한테 너무 다정해서 질투가 났나 봐.”
“임지안!”
서강준은 한미주를 품에 안으며 얼굴이 일그러졌고 눈빛은 날카롭고 무서웠다.
“네 언니를 죽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미주까지 죽이려고 들어?”
그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내가 찾아낸 지현이를 가장 닮은 대역이야!”
멀리서 구급차 사이렌이 울려왔다.
서강준은 한미주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차에 태웠다.
그가 떠나기 전 임지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미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살아 있는 게 지옥이게 만들어 줄게.”
임지안은 비에 젖은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치맛자락이 빗물에 젖었지만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눈물이 섞인 웃음이었다.
살아 있는 게 지옥이라니, 그녀는 이미 그 지옥 속에 살고 있었다.
그날 밤,
임지안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서강준은 단 한 통의 전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냥 넘어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새벽 세 시.
쿵.
별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서강준은 어둡고 음산한 얼굴로 들어와 이불을 들추고 임지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일어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병원에 가서 미주에게 네 피를 줘.”
임지안은 비틀거리며 끌려 나왔다. 속이 뒤틀리며 통증이 밀려왔다.
“내가 밀친 거 아니야.”
“그 입 다물어!”
그는 그녀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
“미주가 과다 출혈이야. 너랑 혈액형이 같으니까 네가 책임져.”
병원 복도는 차갑고 흰 불빛으로 가득했다.
임지안은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불빛 아래서 채혈실로 밀려들어 갔다.
간호사가 바늘을 들고 다가오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저기, 이분은 피를 뽑으면 안 되세요.”
“왜 안 돼?”
그의 목소리가 낮고 무섭게 울렸다.
간호사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검사 결과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이미 암 말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