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암 말기라고?”
서강준이 냉소를 터뜨리며 비웃는 눈빛으로 임지안을 바라보았다.
“임지안, 너 정말 대단하네. 간호사까지 매수하다니.”
임지안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가 손으로 그녀를 채혈 의자에 강하게 눌러 앉혔다.
“뽑아.”
바늘이 혈관에 꽂히는 순간, 임지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피가 관을 따라 천천히 흘러 나갔고 그녀의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좀 더 뽑아. 미주에게 필요하니까.”
서강준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자신의 피가 봉투마다 채워져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임지안은 눈앞이 새까매졌다.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건 한미주의 병실 쪽으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서강준의 뒷모습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간호사가 링거를 갈고 있었다.
임지안이 깨어나자 간호사는 안타까운 눈으로 말했다.
“임지안 씨, 왜 대표님께 암에 걸린 걸 말씀 안 하셨어요? 이렇게 피를 많이 뽑으면 병세가 더 빨리 악화돼요.”
천장을 바라보며 임지안은 거의 들리지도 않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도 소용없어요.”
‘서강준은 믿지 않을 테고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
하루 종일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주변에서는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서 대표님이 그 한미주 씨한테 정말 정성을 다하더라. 밤새 한숨도 안 잤대.”
“그러게 말이에요. 세수시키고 밥 먹이는 것까지 직접 했다던데...”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임지안은 링거 바늘을 뽑아버리고 퇴원 절차를 밟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휴대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
한미주가 보낸 사진이 수십 장 와 있었다.
서강준이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고 죽을 한 숟갈씩 떠먹이며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는 사진들.
그 사진들을 바라보다가 임지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서강준은 평생 단 세 사람에게만 마음을 쏟았다.
임지현, 결혼을 속이며 만났던 임지안, 그리고 임지현의 대체품.
그녀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어 라이터를 꺼냈다. 서강준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불 속으로 던졌다.
그가 그녀를 속이며 줬던 선물, 둘이 함께 찍은 사진, 커플 목걸이까지. 불꽃은 마치 그녀의 남은 생명마저 태워버리듯 그 모든 거짓된 추억을 집어삼켰다.
문이 벌컥 열리며 서강준이 들어섰다.
그는 불 앞에 무릎 꿇은 임지안을 보았다.
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는 달려들어 그녀의 멱살을 잡으며 그녀를 벽에 밀쳤다.
“누가 지현의 물건을 건드리랬어?”
임지안은 숨이 막혀 힘없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강준은 그녀를 거칠게 내던졌다. 불구덩이가 엎어지며 불씨가 사방으로 튀었다.
“임지안, 지현의 물건에 손대면 너를 생지옥에 보내버릴 거야!”
그는 분노에 찬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타오르는 불 속에 처박았다.
살이 타는 냄새가 가득 퍼졌다.
임지안은 고통에 몸을 비틀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며 다른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걸린 건 장식용 돌멩이 하나였다.
돌이 서강준의 관자놀이에 세게 부딪혔고 그는 고통에 손을 놓았다.
임지안은 곧장 팔을 빼냈지만 손목부터 팔뚝까지는 이미 흉하게 물집이 부풀어 있었다.
“잘 봐.”
그녀는 고통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바닥을 가리켰다.
“내가 태운 건 내 물건이야. 서강준, 눈이 멀었어?”
멍하니 서서 서강준은 타다 남은 사진을 내려다봤다.
불꽃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순간 움찔했다.
“너...”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한미주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준아, 상처가 다시 벌어졌어... 아파.”
서강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태워. 네 그 쓰레기 같은 것들 전부 태워버려.”
문을 나서기 전 서강준은 다시 멈춰 섰다.
“애초에 너를 속이면서 가까이했던 그 모든 순간이 역겨웠어.”
문이 쾅 닫혔다.
임지안은 불 속에서 점점 사그라지는 재를 바라보며 고통스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임지안은 불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그녀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 그녀의 모습은 이미 다른 얼굴이었다. 뼈만 남은 듯한 앙상한 얼굴, 흉하게 타버린 손목,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창백한 피부.
그 후 며칠 동안, 서강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뉴스에서는 그와 한미주의 소식이 넘쳐났다.
‘은성 그룹 대표, 연인을 위해 수십억 호화 저택 구매’
‘서강준, 새 애인과 자선 파티 참석’
TV를 끄고 임지안은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음 끝에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야?”
서강준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뒤에서는 한미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꽉 쥐며 임지안이 말했다.
“잠깐만 와줘.”
“시간 없어.”
“반달이 다 지났어. 너한테 줄 대답도 준비됐고.”
잠시 침묵이 흐르고 서강준의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임지안, 아직도 그런 핑계로 나를 불러낼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또 속을 줄 알아?”
“진심이야.”
“됐어!”
거친 목소리로 서강준이 말을 끊었다.
“나랑 미주는 여행 중이야. 이제 그런 유치한 장난 좀 그만해.”
전화는 무참히 끊겼고 임지안은 잠시 휴대폰을 들고 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곧 눈물로 번졌다.
‘서강준, 이제 우리는 마지막 인사조차 못 하겠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드레스를 꺼내 입고 임지안은 다섯 해 동안 살아온 집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
택시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멈췄다.
요금을 치르고 내린 임지안은 천천히 다리 중앙으로 걸어갔다.
밤바람이 드레스 자락과 머리카락을 스쳤다.
강물은 반짝이며 강변의 불빛을 품고 있었고 꿈처럼 아름다웠다.
여기가 바로 강민 오빠와 언니가 사고를 당했던 곳이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며 임지안은 그날의 장면을 떠올렸다.
강민 오빠는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고 지현 언니는 초조하게 전화를 걸며 중얼거렸다.
“지안아, 제발 전화받아...”
그 순간, 맞은편의 화물차가 미끄러지듯 돌진해 왔다.
“미안해요...”
임지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집을 뛰쳐나오지만 않았어도 사고가 안 났을텐데...”
위 통증이 갑자기 밀려와 그녀는 몸을 굽히며 피를 토했고 마치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피가 드레스 위에 튀었다.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강민오빠, 언니...”
그녀는 난간을 놓았고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이제 나도 갈게요.”
석양은 피처럼 붉게 물들었고 물결 위로 금빛이 흩어졌다.
눈을 감고 임지안은 한 발짝 내디뎠다.
풍덩.
차가운 강물이 그녀의 몸을 삼켰다.
참 따뜻했다.
‘서강준, 이제 너를 놓아줄게. 그러니, 너도 나를 놓아줘. 이로써 우리 사이는 생사로 갈라졌고 다시는 서로에게 아무 빚도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