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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할게. 강씨 가문의 그 식물인간과 결혼해 준다고, 내가.” 벽에 비스듬히 기댄 신주은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신성철은 예상치도 못한 딸의 대답에 하마터면 피우고 있던 시가를 값비싼 러그 위에 떨어트릴 뻔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활짝 웃으며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결혼식 준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빠가 뭐든 다 해줄 테니까 주은이 너는 그냥...” “그게 다야?” 신주은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생아를 대신해서 시집가는 건데 뭐 더 없어?” 그녀의 말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신주은, 말 예쁘게 안 해? 하린이는 사생아 아니고 네 동생이야.” “같은 배에서 태어나야 내 동생이지.” 신주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신성철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바람을 피워서 데려온 애를 멋대로 내 동생이라 칭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신성철은 당장이라도 호통칠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금방 생각을 바꾼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2조. 그리고 나 성남으로 가고 나면 문재하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신하린한테 경호원으로 붙여주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신주은의 태연한 말에 신성철은 눈에 쌍심지를 켜며 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2조? 지금 나더러 내 유동 자산의 전부를 너한테 주라는 말이냐?!” “싫어?” 신주은은 언제든지 말을 번복할 수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신성철을 바라보았다. “싫은 거면...” “잠깐! 네가 성남으로 시집가는 그날,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니까 너도 번복할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한 말 지켜!” 신성철은 이를 꽉 깨물며 신주은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실 이 혼인은 원래 그가 둘째 딸인 신하린을 위해 어렵게 잡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딸이 근심 걱정 없이 앞으로도 평생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으니까. 하지만 약속을 잡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강씨 가문의 후계자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식물인간 선고까지 받아버렸다. 그런 남자와 결혼을 시켰다가는 고생길만 열릴 게 분명했기에 신성철은 그 혼인을 둘째 딸이 아닌 평소 왕래가 잦지 않던 큰딸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신주은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문을 열려는데 등 뒤에서 신성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돈은 그렇다 쳐도 문재하는 왜 안 데려가려는 거냐? 문재하만은 결혼해도 곁에 두겠다고 할 줄 알았다.” 신주은의 손이 움찔하며 멈췄다. 문재하라는 이름이 비수처럼 날아와 그녀의 가장 여린 곳에 턱하고 박혔다. 신주은은 눈가가 뜨거워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아무런 대답도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늦은 밤. 본가에서 나와 다시 별장으로 돌아온 신주은은 여느 때처럼 계단을 오른 후 문재하의 방 너머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 방을 지나치려던 그때 문 안쪽에서 남자의 신음이 들려왔고 이에 그녀의 발걸음은 바로 멈춰버렸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안을 바라보니 문재하가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누군가의 사진을 보며 욕구를 해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재하는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아... 하린아, 하린아...” 그가 보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작년 생일 파티 때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천사처럼 웃고 있던 신하린의 사진이었다. 신주은은 손톱이 살갗을 다 뚫을 정도로 주먹을 꽉 말아쥐며 30분 전에 신성철이 물었던 질문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렸다. ‘왜 안 데려가냐고? 그야 문재하도 당신처럼 신하린만 좋아하니까.’ 신주은은 문재하를 처음 봤던 그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경호원을 고르기 위해 체격 좋은 남자들을 한가득 불러 모은 그날, 그녀는 고민도 안 하고 문재하를 콕 집어 자신의 경호원으로 두겠다고 했다. 이유는 심플했다. 문재하가 지나치게 잘생겼으니까. 188cm의 큰 키, 넓은 어깨와 근육이 다부진 몸, 거기에 화려한 이목구비와 밤하늘을 그대로 수놓은 듯한 눈동자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를 하도 자주 바꿔서 ‘난봉꾼’으로 불리고 있던 당시의 신주은에게 문재하는 새로운 장난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은근히 유혹하여 침대로 끌어들여 보려 했다. 술에 취한 척 달라붙어도 문재하는 아무 표정 없이 그녀를 고양이 다루듯 들어 올려 소파에 내려놓고는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자러 갔다. 야심한 밤에 노출이 심한 잠옷을 입고 문을 두드려도 마찬가지였다. 문재하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외투를 건넨 뒤 그녀를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일부러 수영장에 빠진 척 허우적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문재하는 허리 한번 잡아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물 밖으로 끌어냈을 뿐이었다. 신주은이 아무리 유혹하려고 해도 문재하는 마치 목석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보통은 자존심이 상해 경호원을 해고할 법도 할 텐데 신주은은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마음이 동해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마음이 움직인 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를 잃은 후 너무 외로워서 이제는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신주은이 7살이던 때 신성철은 갑자기 상간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데리고 왔다. 이름은 신하린, 신주은과는 고작 3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은 아이였다. 즉, 10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줄곧 두 집 살림하고 있었단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신하린이 집으로 들어온 그날, 신주은의 아늑하고 따뜻했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당시 둘째 아이를 배고 있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집안이 떠나가라 남편을 추궁하며 소리를 지르다 결국 배가 아파 와 병원으로 실려 갔었다. 구급차를 빨리 부른다고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분노와 절망으로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버렸고 결국 수술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만 버티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아이도 그렇게 엄마의 뱃속에서 숨을 거두고야 말았다. 그날 이후 신주은은 신성철을 더 이상 아빠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신하린과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끔찍이도 싫어 따로 나가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예쁜 얼굴이었던 탓일까, 성인이 된 후로부터 질 나쁜 남자들이 자꾸 꼬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고민하다 3년 전부터 밀착 경호원을 고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고용된 경호원이 바로 문재하였고 그녀는 365일, 하루의 18시간 가까이 거의 문재하와 함께했다. 하지만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사랑이 점점 켜졌던 신주은과 달리 문재하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함께 있어도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그녀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3년이나 이러니 신주은도 슬슬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문재하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다른 취향을 가진 남자일 수도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지 얼마 안 가 우연히 방을 지나다 문재하가 스피커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걸 들어버렸다. “도련님, 경호원 놀이는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십니까? 문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분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러시는지 저는 통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린 씨가 그렇게도 좋으면 차라리 신분을 밝히고 당당하게 마음을 고백하세요. 신하린 씨의 언니를 경호하면서 힐끔힐끔 보고만 있지 마시고요.” “하린이는 밖에서 낳아 온 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던 터라 어릴 때부터 눈치만 보고 자라서 내가 갑자기 좋다고 고백하면 많이 놀랄 거야.” “하... 냉혈한이라고 소문난 분이 어쩌다 임자를 만나서는. 그런데 신주은 씨는 여전히 도련님을 마음에 들어 하십니까? 남자가 빨리 바뀌기로 워낙 유명한 분이라 어쩌면 도련님도 신주은 씨의 유혹에 넘어간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문재하는 비서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피식 웃었다. “내가 그딴 여자한테 넘어갈 리가 없잖아.” 그 순간 신주은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해 똑바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저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미 신하린으로 마음을 다 채우고 있어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었다. 신주은은 그날 일을 떠올리며 문재하가 깜짝 놀라든 말든 문을 벌컥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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