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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서씨 가문의 귀한 막내딸 서은수는 상류 사회에서 ‘얼음 공주’로 통했다. 숱한 재벌가 아들들이 그녀에게 앞다투어 구애했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녀가 선택한 결혼 상대는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은 몰락한 도련님 강지훈이었다. 저렴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 그리고 그 결혼 생활의 내막은 더욱 스산했다. 신혼 첫날 밤, 서은수는 정성껏 준비한 란제리 속옷으로 갈아입고 그의 옆에 누웠다. 남자는 흥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무심하게 밀쳐내며 서재로 가서 업무를 처리하겠다는 핑계를 둘러댔다. 서은수가 열병에 시달려 몽롱해졌을 때, 남편이 물 한 잔 가져다주길 바랐지만, 그에게 손가락이 닿는 순간, 질색하며 손을 거두고 덤덤하게 물었다. “내일 차영 그룹과의 미팅에 정상적으로 참석할 수 있겠어?” 다만 그도 언제나 이렇게 절제하고, 무미건조한 사람은 아니다. 한번은 술에 취해 돌아오더니 그녀가 있는 안방으로 불쑥 쳐들어와 밤새 굉장한 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침실로 달려가 열 번도 넘게 샤워를 했다. 그럼에도 서은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강지훈을 도왔고, 결혼 후 불과 2년 만에 구미 그룹을 기적처럼 재기시켰다. 하지만 강지훈이라는 얼음장 같은 남자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서은수는 마지못해 스스로 위로했다. 남편이 타고나길 무심한 성격이라, 누가 그의 아내가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던 결혼 5주년 기념 연회에서 서은수가 손님들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보았는데 꼭 마치 별장 지하에서 뛰쳐나온 듯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여자가 걸음을 휘청거리며 서은수에게 달려오더니 한없이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꽉 붙잡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서은수 씨, 제발 절 좀 살려주세요. 강지훈 그 변태가 저를 5년 동안 지하에 가두어 놓았어요!” “매일 밤 은수 씨가 잠든 후에 저를 찾아와서 모질게 괴롭혔어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 정말!” 여자가 입고 있던 청량한 바니 잠옷은 잔뜩 파여서 맨살이 훤히 드러났고 곳곳에 야릇한 빨간 자국이 남아 있어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은수는 처음에 믿기지 않았다. 냉담하기 그지없는 강지훈에게 어떻게 그런 집착광 면모가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무심코 옆에 있는 강지훈을 쳐다봤다. 고귀한 옆모습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고 심지어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은 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연회는 엉망이 되어 급하게 마무리했다. 강지훈은 서은수에게 이 말만 남기고 떠났다. “먼저 손님들 보내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서은수는 마지막 남은 체면을 애써 유지하며 모든 손님을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홀린 듯 지하실 문으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서 강지훈과 그의 비서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비서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도승아 씨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이유는 소문이 널리 퍼져 사모님께 이혼을 강요하려는 목적인 것 같아요. 대표님, 도승아 씨와 정말 계속 관계를 이어가실 겁니까?” 강지훈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송곳처럼 서은수의 고막을 사정없이 찔렀다. “6년 전에 승아가 회사 최고 기밀을 챙겨서 딴 사람과 야반도주했어. 바로 그 때문에 구미 그룹이 파산했지.” “나중에 내가 승아 찾아내고 은수 몰래 이곳에 감금했어. 처음엔 복수심 때문이었는데 서서히 알겠더라. 난 여전히 승아를 깊이 사랑해서 딴 사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더라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도승아랑 안 헤어져.”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사모님은 어쩌시고요? 이미 다 알게 됐는데 만에 하나 이혼이라도 하겠다면...” “아니. 걔는 그럴 배짱 없어.” 강지훈의 목소리에는 모든 것을 통제하는 차분함이 묻어났다. 문밖의 서은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고,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남편이 타고난 냉랭함 때문에 그런 거라고 여태껏 믿어왔는데 정작 이 인간은 모든 열정과 집착을 딴 여자에게 퍼붓고 있었다. 스스로 지옥에 밀어 넣고 또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그 여자에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강지훈이 지하실 문을 열고 사색이 된 서은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서은수는 이 남자의 잔잔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가에 담아둔 마지막 희망의 불꽃까지 매정하게 꺼져버렸다. “이혼해, 강지훈. 난 저딴 더러운 여자랑 내 남편 공유하며 살 수 없어.” 강지훈의 눈빛에는 놀라움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서은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고 야유를 날렸다. “그러는 넌 또 얼마나 고귀한데? 잡종 같은 사생아일 뿐이면서.”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서은수의 가슴 깊은 곳을 깊숙이 찔렀다. 그랬다. 밖에서는 서씨 가문의 귀한 막내딸로 여겨졌지만, 가문 안에서 그녀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생아였고, 하인보다 못한 잡종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씨 가문 어르신에게 강간당해 서은수를 낳았다. 나중에 구미 그룹이 파산 직전에 이르자, 원래 강지훈과 약혼했던 둘째 언니가 파혼을 요구했고, 그제야 서씨 가문에서 쓸모없는 딸 서은수를 떠올렸다. 그녀를 대신 강지훈에게 시집보내려 한 것이다. 한편 그녀는 몇 년 전에 강지훈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망설임 없이 결혼에 응했다. 불과 2년 만에 서은수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강씨 가문을 다시 정점을 찍게 했다. 강지훈도 언젠가 자신의 노력과 헌신을 알아주고, 소중한 진심에 감동할 거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보니 모든 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기대였고, 스스로를 속인 희극에 불과했다. “넌 예쁘고 똑똑하고 현명하니 안심하고 살아. 너보다 강씨 가문 사모님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 넌 그냥... 승아만 받아들이면 돼.” “내가 싫다면?” 서은수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강지훈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아찔함이 묻어났다. “그래도 되지. 하지만 식물인간이 된 너희 엄마가 병원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건 원치 않을 텐데?” 서은수는 주먹을 불끈 쥐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이 고통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자신을 거의 죽게 만들었던 도승아를 위해, 지금 아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를 협박하고 있다니. 이건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선홍색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강지훈은 허공에 대고 그녀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 잔혹함이 가득 찼다. “우리의 행복하고 완벽한 결혼 생활을 위하여! 영원히 함께하자.” 서은수는 굴욕과 분노에 휩싸여 표정이 굳었지만 남자는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젖히고 잔을 단숨에 비웠다. “보상으로 주식의 10%를 줄게.” 강지훈은 와인잔을 내려놓고 마치 베푸는 것처럼 경멸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명심해. 앞으로는 더 순종적인 개가 되어야 할 거야.” 말을 마치고 더는 서은수를 쳐다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텅 빈 거실에는 서은수의 거친 숨소리만이 남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책상 위 놓여 있던 값비싼 와인병을 번쩍 들어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퍽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호박색 액체가 핏물처럼 바닥에 쏟아지는 것을 보며 서은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는 고작 남들이 베푸는 은혜에 힘입어 이날 이때까지 역경을 헤치고 나온 게 아니다. 강지훈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뺏어올 것이다. ‘강지훈, 넌 이제 네가 저지른 모든 것에 대해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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