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여다현이 한 일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병원으로 가서 다섯 달 된 아이를 지우는 일이었다. 발길질할 정도로 큰 아이라 여다현은 울지 않으려 이를 꽉 악물었지만 간호사가 아이를 한번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자 정신이 까마득해져 연신 고개만 저었다.
둘째는 바로 이혼 서류였고 작성하자마자 바로 신지환에게 전화했다. 예전 같으면 신호음이 울리기 바쁘게 받고 “자기야”라고 불렀겠지만 이번에는 꼬박 23통을 걸어서야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는 매우 시끄러웠고 신지환의 친구들이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렸다.
“첫사랑의 위엄이 세긴 세다? 이제인이 귀국하자마자 임신 5개월인 여자를 집에 버려두고 나왔잖아.”
“대용품이니 어쩔 수 없지. 지환이가 이제인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헤어지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못 잊어서 대용품이라도 옆에 둔 거잖아.”
“다현 씨는 그것도 모르고 맨날 들러붙더라. 저번에 지환이랑 키스하는 거 봤는데 얼마나 찰싹 붙어서 애교를 부리는지 나까지 살살 녹는 줄 알았다? 나였으면 진작 이제인은 까맣게 잊었을 거야.”
“지환이 생긴 건 차갑게 생겨도 순정남이잖아. 이번 생은 이제인에게 꽉 잡혔다고 봐야지. 봐. 이제인이 하이힐 때문에 발이 까졌다고 하니까 바로 안고 편안한 신발 사러 간 거...”
핸드폰을 쥐고 있는 여다현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때 수화기 너머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누가 내 핸드폰 건드렸어?”
신지환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그래? 모르지. 실수로 눌렸나 보다...”
수화기 너머로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주변이 조용해졌다. 신지환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늘 그렇듯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자기야, 왜 그래? 우레가 울어서 잠이 안 와?”
“나 오늘 접대가 있어서 조금 늦게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되지?”
여다현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가 전화한 건 이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환아, 나 발 아파...”
신지환이 잠깐 뜸 들이더니 여다현에게 말했다.
“착하지. 먼저 자.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갈게.”
이윽고 전화가 끊겼다. 여다현이 웃으며 눈물을 닦아내더니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신지환을 위해 준비한 두 개의 “선물”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이혼 서류, 다른 미처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두 사람의 아이였다.
진심을 저버린 사람은 천벌을 받아 마땅했다. 여다현은 나이가 어렸지만 기만은 용서할 수 없었고 그녀를 기만한 사람은 사랑했든 아니든 가차 없이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여다현이 아이가 담긴 선물함을 냉장고에 넣는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자기야, 아직도 안 자고 뭐 했어?”
신지환이 슈트를 벗고 안으로 들어오며 넥타이를 풀었다.
“냉장고는 왜? 배고파?”
여다현이 대답하지 않고 신지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갑자기 차가워진 여다현이 이상했는지 신지환이 등 뒤에서 정교한 도시락을 꺼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산다고 엄청나게 돌아다녔어. 자기 요즘 이거 좋아하잖아.”
신지환이 도시락에서 꺼낸 간식은 죄다 여다현이 입덧하면서 즐겨 먹던 간식들이었다. 예전 같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뽀뽀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우스웠다.
“왜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어? 아이가 못살게 굴어?”
신지환이 이렇게 말하며 여다현의 배에 손을 올리려는데 여다현이 쳐내며 서류를 건넸다.
“사인해요.”
멈칫한 신지환이 서류를 확인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고 여다현도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
[이제인]
수화기 너머로 이제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신지환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전화를 끊고는 서류를 확인하지도 않고 부랴부랴 사인했다.
“자기야,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 먼저 자.”
신지환이 차키를 들고 나가려다 현관에서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로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인받지 말고 그냥 사. 우리 부부잖아. 내가 가진 전부가 네 것이니까.”
여다현이 사인을 마친 이혼 서류를 꽉 움켜쥐고는 입꼬리를 당겼다.
“신지환 씨, 우리는 곧 남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