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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날 밤 여다현은 길고 긴 꿈을 꿨다. 꿈에서 여다현은 신지환을 처음 만났던 그날로 돌아갔다. 여다현의 나이 18살, 아버지와 함께 신씨 가문의 파티에 참석한 날 잘빠진 까만 슈트를 입고 피아노 옆에 서서 기다란 손가락으로 샴페인 잔을 든 조각 같은 신지환을 보고 그녀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러다 용기 내어 신지환에게 몰래 키스했는데 그는 멈칫하더니 이내 나지막한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키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신지환이 여다현의 머리를 살포시 받쳐서 들고 진짜 키스가 뭔지 보여줬다. 끝날 줄을 모르는 키스에 숨이 막혀오던 그 느낌은 아직도 꿈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잠에서 깨는데 베개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기분을 추스른 여다현이 핸드폰을 들어 아버지 여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이혼했어요.” 여다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 절차 끝나면 외국으로 찾으러 갈게요.” “지환이가 괴롭히든?” 여도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요.” 여다현이 점점 밝아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아요.” 사실 신지환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맞다고, 그녀도 더는 사랑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뱉기도 전에 유리 조각처럼 가슴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전화를 끊는데 카톡 알림이 떴다. 갑작스러운 친구 추가에 여다현이 홀린 듯이 수락하는데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영상 속 소파에 누워 가볍게 잠든 신지환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 이름을 연신 외쳤다. “제인아...” 곧이어 장문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제인이에요. 지환이의 첫사랑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더 낫겠네요. 오랜 시간이 지났고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한 것 같아요. 오늘 귀국해서 보니까 손목 안쪽에 아직도 내 이름으로 새긴 문신이 남아있더라고요. 우리가 함께한 사진, 함께한 시간 동안 적었던 일기까지 다요. 지금도 봐요. 꿈에서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잖아요. 아마도 우리의 과거를 떠올린 것 같아요. 하긴,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첫사랑일 거예요.] 여다현은 그 메시지를 보며 가슴이 저렸지만 그저 이렇게 답장했다. [뭐 하자는 거예요?] 상대는 한참 지나서야 답장했다. [뭘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냥 내 것이었던 걸 되돌리려는 거지. 곧 깨어날 것 같은데 내가 나쁜 꿈을 꿨다고 하면 앞으로 오 일간 쭉 내 곁에 남아있으면서 당신에겐 연락조차 안 할 걸요? 어떻게 생각해요?] 여다현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분 뒤, 신지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자기야. 프로젝트 때문에 5일간 출장을 다녀와야 해. 비서 남겨두고 갈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올 때까지 아이랑 잘 있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여다현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다가 눈물이 후드득 핸드폰에 떨어졌다. 앞으로 5일간 신지환은 그 어떤 연락도 없었지만 이제인의 메시지는 끊이질 않았다. 신지환과 함께 바닷가에서 산책한다는 둥, 산정상에서 일몰을 본다는 둥, 같이 드라이브한다는 둥 말이다. [연애할 때 자주 오던 곳들이에요.] 이제인이 보낸 문자를 빠짐없이 확인한 여다현은 문득 전에 신지환이 데려갔던 곳임을 기억해 냈다. 그때는 신지환이 로맨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녀를 통해 다른 사람을 추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5일째가 되던 날 밤, 여다현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지환이 선물한 주얼리, 가방, 옷가지,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박스에 넣어 다용도실에 던져버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신지환이 몰라보게 허전해진 드레스룸을 보고 멈칫했다. “자기야, 뭐해?” 여다현이 고개도 들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쓸모없는 물건들 좀 버렸어요.” 신지환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웃으며 손에 든 선물을 건넸다. 한정판 그림책이었다. 지난달에 지나가는 얘기로 수집하고 싶다고 했는데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자기야.” 신지환이 자연스럽게 여다현을 품에 꼭 끌어안더니 손으로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요즘도 입덧 심해? 내일 검사받으러 가지? 같이 가자.” “아니.” 여다현이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앞으로 그럴 필요 없어요.”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신지환이 이렇게 말했다. “필요 없다니. 요즘 어디 아파?” 옆에 있던 도우미가 끼어들었다. “사모님 요즘 입맛이 별로라 거의 드시지 않습니다.” 신지환이 얼른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 “장 봐서 요리해 줄게. 네가 좋아하는 요리로 준비할 거니까 조금이라도 먹어.” 그러면서 도우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사모님 잘 챙겨요. 어디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고요.” 도우미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수군거렸다. “대표님 정말 사랑꾼이야...” “남편을 찾으려면 모름지기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니까...” 여다현은 그 소리가 참 우스웠다. 그녀도 예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교묘하게 설계된 대타 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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