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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희미한 불빛 아래, 상체를 탈의한 한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예쁘게 자리잡힌 근육은 아래위로 움직이다 못해 이제는 움찔움찔 떨려댔고 팔뚝에 솟은 힘줄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젠장...” 낮은 욕설이 들려왔다. 누군가의 계략으로 발정기가 앞당겨진 테온은 지금 온몸이 타오를 것처럼 뜨거웠다. 더 이상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달해버린 순간, 그는 옆에 누운 여자의 옷가지를 단번에 찢어버렸다. 성지우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천 쪼가리 하나가 무참히 뜯겨나가는 걸 느끼면서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 죽은 거 아니었나...? 이 인간은 뭐지? 왜 내 위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거지? 왜... 왜 내가 죽어서도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해?!’ 누군가에게 범해진다는 분노에 그녀는 강한 정신력으로 눈을 번쩍 뜨고 남자의 몸을 밀어내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녀의 힘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녀의 반항은 오히려 남자의 정복욕만 더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당신 뭐야... 읍... 저리 안 비켜?!” 테온은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아니, 이건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 달뜬 호흡, 뜨거운 공기, 성지우는 이대로 가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지막 힘을 쥐어짜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마음으로 남자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자신이 누구에게 각인한 건지도 모르고 말이다. ... 테온은 정신을 차린 후 누군가가 옆에 있는 느낌에 금세 경계태세를 취하며 상대방의 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테온은 나체 상태의 여자를 보며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났다. 평생 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기어코 건드려버렸다. 그는 일평생 여자를 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특히 예쁜 여자는 예쁜 만큼 리스크가 컸기에 더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이능력이 워낙 강했기에 후사를 이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 굳이 여자를 곁에 둘 필요가 없었다. 테온은 음산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그녀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듯 눈을 번뜩이며 손톱을 세웠다. 하지만 찌르려고 하던 찰나 여자의 팔에 난 은색의 뱀 문양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문양에 넋이 나가려 버렸고 그 순간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들었다. 테온은 반사적으로 총알을 덥석 낚아채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맞은편 빌딩의 옥상에 서 있는 남자는 힐턴 제국의 대령인 레스더 볼찬이었다. 에릭은 총소리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테온의 앞을 막아섰다. “도련님, 가시죠. 레스더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고작 대령 하나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에릭은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 레스더는 총을 거두어들이고는 에릭과 테온이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상부의 지시로 그들의 나라에 거점을 세운 것도 모자라 어린 소녀들을 잡아들여 술 상대를 시킨 반란자 연맹을 처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명령에는 한가지 요구가 있었다. 그건 바로 테온은 절대 건드리지 말 것. 나라 간의 싸움은 이곳에서는 흔한 일로 아무도 없는 별로 가 승자와 패자를 정하고 이기는 쪽이 진 쪽에게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 수인들의 신인 [가디스]가 정한 법칙이었다. 반란자 연맹은 성정이 포악하고 또 교활하기 그지없기에 만약 레스더가 테온을 죽이면 반란자 연맹은 힐턴 제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해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무런 죄도 없는 시민들만 피해를 받게 된다. 레스더는 유유한 발걸음으로 방금까지 테온이 머물렀던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나체의 여자와 방안을 가득 메운 끈적한 기운, 이곳에서 테온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편 기절해버린 성지우는 현실 세계가 아닌 사방이 조용한 한 공간에 들어오게 되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려는데 웬 기계음이 들려왔다. [비타 시스템 가동.] [숙주 매칭 중.] [매칭 성공.] [전송 성공.]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흰색의 작은 공 같은 것이 성지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지우 님. 매칭에 성공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성지우 님을 모시게 될 겁니다.] [잠시 후 성지우 님께서 앞으로 하셔야 할 퀘스트와 해당 세계의 자료를 보여드릴 겁니다. 중요한 자료이니 자세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성지우는 시스템의 말대로 눈앞에 나타난 글을 자세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인간의 문명이 완전히 사라진 해당 세계에는 자연과 동물만이 남게 되었고 동물들은 어느 순간 지성을 겸비한 수인이 되어 나아가 이능력까지 갖게 되었다. 수컷 수인은 이능력으로 지위와 권위가 결정된다. S급은 하위등급, SS급은 중등급, SSS급은 상위등급, 그리고 SSS+급은 최상위등급이자 희귀등급이었다. SSS+급이 희귀등급이라 불리는 이유는 한 나라에 평균적으로 나타나는 SSS+급이 한두 명 정도로 매우 적기 때문이다. SSS+급의 수인들은 가디스에게 축복받은 아이들이라 불렸으며 전도유망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후대를 남기기 어렵다는 약점이 존재했다. 암컷은 수컷과 달리 생식 능력으로 지위가 결정되게 된다. 등급은 이능력과 마찬가지로 네 가지 등급으로 나뉘고 반려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수컷에게 각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말이 네 가지 등급이지 이제껏 제일 높은 등급은 SS급으로 그 이상은 없었다. SS급 암컷이 그 이상의 등급을 가진 아이를 낳는 건 불가능했기에 SS급으로 태어난 아이가 더 높은 등급으로 가기 위해서는 후천적으로 이능력을 키우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지우는 수인 세계에 떨어진 암컷으로 이능력이 강한 수컷을 찾아 반려 관계를 맺고 높은 등급의 아이를 낳으면 상당히 많은 포인트를 모을 수 있게 된다. 모은 포인트는 시스템 스토어에서 필요한 물품으로 교환할 때 쓰이게 되기에 많이 모을수록 좋았다. 성지우가 해야 할 일은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를 완성하는 것으로 최종 퀘스트까지 성공하면 그녀와 그녀 가족들에게 한 번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새로운 시작을 거절하시게 되면 성지우 님은 원래의 세계에서 지정된 수명에 따라 죽게 되며 시스템은 다음 매칭자를 찾게 됩니다. 거절할 기회는 지금뿐이니 신중하게 결정해 주세요.] 성지우는 가족들을 살릴 수 있다는 문구에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태어났던 지구는 갑작스럽게 터진 좀비 바이러스로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고 그녀의 가족은 세계 멸망이라는 절망 끝에 나란히 독을 마셨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데 어떻게 시스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우 님.] 시스템의 말을 끝으로 성지우는 천천히 현실 세계에서 눈을 떴다. 고개를 살짝 돌려 주위를 훑어보니 창밖을 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태 파악을 위해 뭐라 물어보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 곳곳을 망치로 세네대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윽...” “일어나셨습니까?” 남자가 느긋하게 몸을 돌리며 퉁명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군복을 입은 데다 시선이 날카롭다 보니 성지우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몸을 움찔 떨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나 보군요.” 남자는 이러한 상황이 익숙했다. 하도 전장을 많이 굴러서인지 여성들은 그가 잘생긴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멀리 피해 다니기 바빴다. “레스더 볼찬입니다. 편히 레스더라고 부르세요.” “성지우예요. 저도... 지우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성지우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신분 조회가 안 되는 걸 보면 아주 어릴 때 인신매매 집단에 납치된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저한테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저는 힐턴 제국의 대령으로 제가 하는 질문은 모두 합법적인 절차에 따른 질문입니다.” 성지우는 머뭇거리며 이불을 꽉 잡고 있다가 문득 자신의 위에서 눈이 반쯤 돌아버린 채 헐떡이던 남자가 떠올랐다. “체육관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레스더는 그 말에 시계를 한번 바라보았다. “감옥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당신처럼 홍등가에 팔린 여성들은 지금쯤 조사를 받고 있고요. 이제 남은 건 성지우 당신뿐입니다.” “네? 홍등가요?” ‘이 미친 시스템! 날 매음굴에 보내버리면 어떡해!’ 레스더는 성지우의 팔에 난 각인 표시를 보더니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한 가지 더 알려드리면 성지우 당신은 지금 반려 관계가 맺어진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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