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용제하는 학교 밖에 집이 있었고 차도 그쪽에 세워놓았다.
학교 정문을 나와 신호등을 건너 몇 분만 걸으면 되는 거리였다. 가끔 밖에서 통금 시간을 넘기면 그 집에서 자곤 했다.
걸어가던 용제하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허이설이 캐리어를 끌고 있었고 옆 사람과 천천히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제하는 걸음이 빠른 터라 곧 두 사람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다 허이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 누구를 좋아하든 이젠 나랑 상관없어.”
“너 혹시 다른 사람 좋아해? 아니면 마음이 이렇게 빨리 바뀔 리가 없는데.”
윤가을의 질문에 허이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 질문에 허이설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여전히 용제하였다.
아마 용제하보다 나쁜 남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말이 적고 문자 답장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숨기는 것도 많았다. 심지어 결혼했는데도 첫사랑과 단둘이 아무렇지 않게 출장을 갔다.
허이설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용제하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허이설은 그처럼 냉정하지 못했다. 용제하를 사랑하지 않으려면 엄청난 자제력이 필요했다.
그와 관련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일부러 화제를 돌려야만 겨우 자제할 수 있었다.
허이설은 이런 자신이 미웠다.
그녀의 침묵에 윤가을은 그녀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로 생각했다.
“누구야, 누구?”
허이설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없어.”
하지만 윤가을의 눈에는 쑥스러워하는 것으로 보였다.
“와, 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두 사람이 한창 즐겁게 얘기하던 그때 허이설은 누군가와 왼쪽 어깨를 부딪쳤다. 옆으로 비켜섰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코끝에 은은한 우드 향이 스쳤다. 뒤에 윤가을이 있어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용제하는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허이설보다 키가 훨씬 커서 고개를 들지 않은 허이설의 시야엔 그의 가슴과 어깨, 쇄골, 목젖만 들어왔다.
그녀는 용제하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고개를 홱 돌렸다.
“뭐야, 너?”
윤가을이 살짝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제하가 평소에 건들거리긴 해도 또래를 압도하는 성숙한 분위기가 있어 말을 걸 때도 조심스러웠다.
용제하의 시선이 허이설에게 내려앉았다.
“대회 참가할 거야?”
허이설은 순간 멈칫했다. 그가 왜 이 질문을 던졌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용제하도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 같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무심했고 웃음기마저 띠고 있었다.
허이설은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고개를 윤가을 쪽으로 돌렸다.
그 모습에 용제하도 더는 묻지 않고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심지어 담배 연기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휙 가버렸다.
떠나면서 손목에 찬 시계가 허이설을 스쳤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고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계는 용제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심지어 침대에서도 절대 풀지 않았다. 차가운 감촉이 스칠 때마다 허이설은 용제하를 꽉 껴안았다. 그러면 그는 재미있다는 듯 손목으로 그녀의 어깨를 스치면서 웃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시계가 그의 첫사랑인 추다희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허이설은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윤가을의 손목을 꽉 잡았다.
“왜 그래?”
윤가을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더위 먹은 건 아니지?”
허이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용제하를 안 좋아하기로 한 게 정말 잘한 선택인 것 같아서.”
윤가을이 허이설의 손을 잡았다.
“아까 한 질문 무슨 뜻일까? 널 신경 쓰나? 그게 아니면 왜 갑자기 저러는 건데?”
허이설이 고개를 들고 차갑게 웃었다. 용제하는 이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없었다.
“날 신경 쓴다고?”
‘그럴 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한 질문도 관심이라고 할 수 있나?’
허이설이 말을 이었다.
“다희 때문이겠지. 내가 대회 안 나가면 다희가 그 자리를 채울 테니까.”
윤가을은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맞네, 진짜.”
순간 소름이 끼쳤다.
“다희랑 제하 고등학교 동창이랬지? 설마 예전부터 다희를 쭉 좋아했던 거야?”
허이설은 지금 추다희와 용제하의 관계를 윤가을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전생에서는 용제하의 휴대폰을 보고서야 알게 됐지만 지금 그녀에겐 그의 휴대폰을 볼 자격이 없었다.
윤가을에게 말하면 일만 복잡해질 것이다.
“우리랑 상관없어. 두 사람이 연애해서 결혼까지 골인한다고 해도 우리랑 아무 상관 없어.”
허이설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추다희는 맨 뒤에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조금 전 용제하가 허이설에게 다가가 대회에 참가할 건지 묻는 걸 봤다.
오늘 추다희는 용제하에게 대회 얘기를 꺼냈고 참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용제하가 별 반응이 없어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허이설에게 참가 여부를 물은 건 정말로 허이설을 빼고 그녀를 대회에 넣으려는 것일까?
추다희는 믿기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용제하를 정말 좋아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자신이 평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용제하는 인기가 매우 많았기에 그녀에겐 승산이 없었다. 용제하 같은 사람이 평범한 그녀를 쳐다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용제하와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다.
나중에 고백할 용기를 냈지만 같은 기숙사의 허이설도 용제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허이설은 집안도 좋고 얼굴도 예쁘며 게다가 수석으로 입학해서 만인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허이설이 용제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사람들은 그녀를 속물이라고 헐뜯었고 용제하의 신분 때문에 매달리는 거라고 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 여러 남자와 사귀고 잠자리했으며 미혼 상태로 유산까지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렇게 허이설의 청순한 우등생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추다희는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이설처럼 뛰어난 사람도 용제하에게 공개적으로 대시하면 모두의 공격 대상이 됐으니까.
만약 그녀가 용제하에게 대시했다면 사람들이 뭐라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결국 추다희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숨긴 채 몰래 용제하를 좋아했다.
허이설이 지하철에 탄 후 추다희는 휴대폰을 꺼냈다. 전에 용제하에게 카톡을 추가하자고 했을 때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바람에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사실 추다희는 이미 용제하의 카톡을 알아냈다. 하지만 추가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그 번호를 입력하고 친구 추가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