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2화

허이설이 집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한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복습 자료를 읽었다. 갑자기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늘 알고 지내던 사업 파트너가 오늘 귀국했다면서 서재 서랍에 있는 USB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장소는 리버사이드 팰리스 옆 골프 클럽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그곳에서 파트너와 골프를 치고 있나 보다. 골프가 끝나면 식사하러 갈 테니 오늘 저녁엔 먼저 어머니와 전과 얘기를 해야 했다.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허이설은 무릎까지 오는 흰 원피스를 입고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파트너를 만났다. 나이는 있지만 꾸준히 운동한 덕인지 뱃살 저주를 피해간 품격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의 옆에 딸이 있었는데 허이설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자연스레 그녀와 함께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자 그녀는 허이설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초대했다. 허이설은 거절하려 했으나 파트너 아저씨도 딸바보인지라 함께 초대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힐끗 봤다. 알 수 없는 표정에 허이설은 결국 수락했다. 어쨌든 사업 파트너라 체면을 세워줘야 했고 또 두 사람의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 길이 막힌 바람에 용제하는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온몸에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면서 문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사모님, 도련님이 오셨어요.” 가정부가 최희원의 손을 잡았다. 최희원이 고개를 들더니 기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휠체어를 밀고 다가왔다. 용제하가 문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수화로 말했다. [또 담배야? 끊으라고 했잖아. 네 아버지가 싫어한다고.] 용제하는 담배를 물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 인간이 당신을 싫어하면 죽기라도 할 거예요?” 도우미 김경숙이 놀란 얼굴로 용제하를 쳐다봤다. “도련님!” 용제하의 날카로운 말에 휠체어에 앉은 최희원은 상처를 받은 듯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제하가 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불렀어요?” 최희원의 눈가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가느다란 손목은 거의 투명할 정도로 하얬다. [네 아버지가 왔어.] 순간 짜증이 더 난 용제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를 유리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다음에 이런 일로 날 부르면 평생 안 올 거예요. 최희원 씨, 제발 자존심 좀 챙겨요.” 최희원이 팔을 들어 수화로 답했다. [왜? 왜 그래야 하는데? 그 사람은 네 아버지고 내 남편이야. 우리 아직 이혼 안 했다고.] 소리 없는 외침이 날카롭게 울렸다. “지금 이 결혼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 인간이 밖에서 낳은 자식을 키우는 게 의미가 있나요? 아니면 6개월에 한 번 집에 오는 그 인간을 기다리는 게 의미가 있나요?” 용제하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 죽을 것 같지 않으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떠나려는데 최희원이 그를 붙잡았다. 김경숙이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도련님, 그래도 어머니인데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때 갑자기 어린아이가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 울던 아이가 용제하의 바지 밑단을 붙잡았다. “형.” “비켜. 누가 네 형이야?” 용제하는 몸을 틀어 피했다. 최희원이 몸을 떨 정도로 심하게 울면서 수화로 말했다. [그 사람 여자를 데려왔어.] 용제하는 동정심 따위 전혀 없이 코웃음을 쳤다. “여자 몇 명을 데려오든 내 알 바 아니에요.” 최희원이 눈물을 닦았다. [네가 가서 좀 봐줘.] 수화로 절반 정도 말했을 때 용제하가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하자 김경숙이 막아섰다. 용제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괜히 왔어.’ 최희원은 이미 삐쩍 말라 뼈가 앙상할 정도였다. 용제하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제하야,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온갖 비굴함과 비참함이 담긴 몸짓이었다. 하지만 용제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따뜻한 조명 아래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얼굴이 더 날카롭게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게 너무나 후회됐다. 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한 번 까딱이더니 가볍게 웃고는 거래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알았어요. 가서 그 여자 문제도 해결해줄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소리에 최희원의 야윈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말해. 다 들어줄게.] “앞으로는 날 찾지 말아요. 난 당신 아들 아니에요.” 최희원은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제하는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할지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용제하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 “이 요리 맛있어요. 한번 먹어봐요.” 옆에 있던 여자가 공용 젓가락으로 허이설에게 요리를 집어줬다. 허이설은 대화 중 그녀의 이름이 민아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사람과 금방 친해졌고 꽤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다. 허이설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아현 씨.” 아버지 허상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며 건배를 제안하자 허이설도 따라 일어나 음료수 잔을 들었다. 의미만 전하면 됐다. “민씨 아저씨,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시길 바랍니다.” 허이설의 말이 끝난 순간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허상도의 시선에 허이설은 바로 알아듣고 문을 열러 갔다. 문을 열자마자 허이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눈앞에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지금은 깽판이라도 치려고 온 것처럼 무서운 살기를 띠고 있었다. 허이설은 놀란 나머지 넋을 잃었다. 용제하도 놀란 듯 덤덤한 눈동자에 의문이 스쳤다. 안을 훑어보고는 이내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허이설을 스쳐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여긴 무슨 일로 왔어?” 허이설이 뒤돌아보니 상석에 앉은 민씨 아저씨가 그에게 묻고 있었다. 목소리가 무거운 게 약간 화가 난 듯했다. 그녀가 제자리로 돌아간 그때 용제하는 민아현의 옆에 있는 의자를 자연스레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됐던 허이설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휴대폰이 진동하여 확인해보니 추다희의 문자였다. [이설아, 제하랑 같이 있어?] 그 시각 추다희는 리버사이드 팰리스 밖에 서 있었다. 용제하를 따라온 것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밖에 허이설 아버지의 차가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전에 허이설의 아버지가 그녀를 학교까지 데려다줬을 때 탔던 차가 브라부스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추다희는 허이설과 용제하가 만날까 봐, 썸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했다. 허이설에게 문자를 보낸 뒤 추다희는 답장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하지만 허이설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추다희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허이설과 용제하가 함께 대회에 나가는 걸 원치 않았고 둘 사이에 어떤 연락도 없기를 바랐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