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3화

용제하가 들어온 뒤로 허이설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민아현이 이따금 허이설에게 말을 걸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상석에 앉은 남자는 묵직한 목소리로 민아현을 제지했다. 허이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용제하가 오기 전에 민아현이 무슨 말을 하든 뭐라 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들고 슬쩍 쳐다봤다. 상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고 용제하는 옆에서 일회용 장갑을 낀 채 느긋하게 새우를 까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길고 가늘어 장갑을 껴도 보기 좋았다. 허이설은 놀란 두 눈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하지만 그의 손을 본 건 아니었다. 용제하가 새우를 까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릇에 새우를 반쯤 채웠다. 허이설뿐만 아니라 상석의 남자도 놀란 눈치였다.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용제하는 그릇을 민아현 쪽으로 천천히 밀었다. 허이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그때 갑자기 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파트너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눈으로 용제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제하는 몸을 뒤로 살짝 기대더니 그를 올려다보면서 느긋하게 장갑을 벗었다. 평범한 일을 한 것처럼 태연했다. 그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침을 살짝 삼켰다. 소매 아래 드러난 남성미 넘치는 팔뚝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허이설은 용제하를 바라보는 민아현의 눈빛을 봤는데 약간 반한 표정으로 그릇의 새우를 집었다. 지금 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적절할까? 용제하와 추다희가 해외로 떠났을 때 허이설은 구체적인 장면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수법을 직접 목격했다. 심지어 유혹이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살짝 새어 나온 애매한 태도만으로도 상대는 정신을 잃고 빠져들었다. 허이설은 파트너 아저씨가 이미 넋이 나간 상태라는 걸 알았다. 식사가 빠르게 끝났고 허이설 아버지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협상이 잘 안 된 모양이었다. 허이설은 상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음료수만 홀짝였다. 이제야 겨우 화장실에 갈 틈이 생겼다. 추다희도 더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허이설은 그녀가 이미 용제하와 만나고 있어서 검사하려고 연락한 건지, 아니면 둘 사이에 썸이 있다고 우월감을 느끼려 연락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그때 허이설은 밖에서 들려오는 어렴풋한 여자 목소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잠깐 조용해졌다가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른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였다. “늙은 남자 좋아해? 눈은 예쁜데 취향이 왜 이렇게 구려?” “나 너 좋아해...” 허이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온몸이 굳어버렸고 휴대폰이 꺼질 때까지 꽉 움켜쥐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용제하와 민아현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들어갈까? 나갈까? 아니면 가만히 있어?’ 몸만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오늘 밤... 너랑 같이 집에 가도 돼?” 민아현은 용제하에게 붙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너무 좋아.” 용제하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가느다란 눈매가 조명 아래 반짝였고 갈색 눈동자는 깊은 애정을 담은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 감정이 없었다. “네가 하는 거 봐서...” 그는 발걸음을 옮겨 거리를 멀리하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난 노인을 공경하는 사람이라 늙은 남자의 것을 빼앗지 않아.” “아까 식사 자리에서 네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돌아가?” 민아현은 용제하의 날씬한 허리와 가슴을 훑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진한 향기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 사람 버리고 너한테 갈게...” 허이설은 발을 뗄 수 없었다. 어깨가 차가운 벽에 닿아 가냘픈 몸이 파르르 떨렸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현 씨랑 아빠의 파트너가 부녀 관계가 아니었구나. 용제하는 아무 여자나 다 홀리는 남자였어.’ 전생에서 그녀가 보지 못했을 때 민아현 같은 여자와 얼마나 많이 얽혔을까? 지금 이 순간 추다희의 문자마저 먼지처럼 하찮고 우스워졌다. 허이설은 소리가 멎기를 기다렸다가 온몸이 차갑게 식은 채로 나갔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고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깊은 자국이 남았다. ... “오늘 반 회의 주제는 국제금융대회야.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은 두 명이고 모두 지원할 수 있어. 나중에 여러 기준으로 평가해서 뽑을 예정이야.” 유진서가 강단에 서서 그럴듯하게 말했다. 사실 이미 누가 나갈지 내정됐음에도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듯한 말투로 소식을 전했다. “두 명밖에 못 나간다고? 그럼 우리 반은 당연히 이설이랑 제하가 나가지 않을까?” “당연하지. 제하는 말할 것도 없고 제하가 나가면 이설이도 무조건 나가겠지.” 추다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휴일 내내 그녀는 용제하가 친구 추가 요청을 받아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응답이 없었다. 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대회에 꼭 나가고 싶었다. 용제하와 가까워질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추다희가 울면서 용제하에게 이미 허이설로 내정된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 허이설은 무조건 용제하를 위해 이 대회에 참가할 것이다. 추다희가 참가하려면 내정된 허이설의 자리를 빼앗아야 했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추다희가 일어섰다. “교수님, 질문이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강압적이지 않고 아주 부드러웠다. 유진서가 강단에서 말했다. “말해봐.” “혹시 누가 나갈지 이미 내정된 건가요? 내정됐다면 우리한테 알릴 필요가 있나요? 아니라면 어떤 기준으로 뽑는 거죠? 성적순이라면 우린 아직 중간고사 한 번밖에 안 봤는데요?” 유진서는 멈칫했다가 추다희를 보며 말했다. “그게... 대회 참가 인원은 공정하고 공평하게 결정될 테니까 모두 지원해도 돼. 신청서를 국제교류센터에 보내면 거기서 학생들의 입학 성적과 학점, 그리고 평소 태도를 기준으로 뽑을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내정이 아니었다. 선발 결과가 나오더라도 어차피 허이설과 용제하일 것이기에 그냥 먼저 두 사람에게 자료를 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허이설이 거절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공정하다는 거죠? 그럼 제 중간고사 순위를 알 수 있을까요?” 학생들은 자신의 시험 점수만 확인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의 점수는 알 수 없었다. 하여 지난 중간고사에서 반 1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지난 중간고사 때 용제하는 시험을 보지 않았고 허이설은 시험 도중에 나갔다. 그러니 1등이 추다희일 가능성도 있었다. 다시 말해 추다희가 허이설을 밀어내고 용제하와 함께 대회에 나갈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허이설이 용제하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까?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