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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저녁에 같이 모여서 신나게 논 게 분명했다. 영상에 용제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상준과 엄형수가 그 자리에 있었고 테이블 위에 용제하의 담뱃갑과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추다희는 이런 글까지 덧붙였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신나게 논 하루. 히히.] 허이설은 시선을 거두고 손끝이 하얗게 될 정도로 펜을 꽉 쥐었다. 이젠 그를 욕할 자격조차 잃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도, 여자친구도 아니었으니까. 밤 11시, 추다희와 박루인이 통금 직전에 기숙사로 돌아왔다. 허이설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윤가을도 침대에 올라 이어폰을 끼고 드라마를 봤다.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기숙사 불이 켜졌다. 추다희의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먹을 것 좀 사 왔어.” 윤가을이 얼른 커튼을 젖혔다. “쉿. 이설이 자고 있어.” 추다희가 잠시 멈칫하더니 윤가을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라도 먹을래?” 그때 허이설은 이미 깨어 있었다. 조금 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추다희가 씻으러 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허이설은 잠이 오지 않아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집에 갈게요.] 허이설의 집은 하경대학교에서 멀지 않았다. 지하철로 30분이면 도착했지만 용제하가 평소 집에 가지 않았기에 허이설도 거의 가지 않았다. 그녀는 용제하와의 채팅 기록을 열었다. 고백 직전에 나눈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운동장으로 꼭 나와. 엄청 중요한 물건 줄 거 있어.] [응.] [언제 와?] [곧 가.] [모기 많으니까 모기 퇴치제 바르는 거 잊지 말고.] [응.] 허이설은 손끝으로 화면을 터치하며 용제하의 카톡을 삭제해버렸다. 순간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했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용제하를 내려놓을 것이다.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 마음을 다잡은 다음 베개를 끌어안고 다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8시 수업이 있었다. 허이설은 자전거에 윤가을을 태운 채 강의동으로 갔다. 강의동 밑에 도착했을 때 아직 2분이 남아 계단을 올라가기엔 충분했다. 자전거를 세우자마자 윤가을이 소리쳤다. “어떡해? 아침밥 못 샀어.” 허이설이 달랬다. “괜찮아. 오늘 오전에 수업 한 교시밖에 없어. 조금만 참으면 밥 먹을 수 있어.” “흠...” 윤가을이 입을 삐죽거렸다. “배 안 고파? 너 먼저 올라가 있어. 내가 금방 가서 사 올게.” “가지 마. 이 교수님 일찍 오신단 말이야.” 시간이 촉박했던 터라 허이설은 윤가을을 끌고 올라갔다. 2분밖에 남지 않아 두 사람은 책을 안고 사람들 틈에 섞여 허둥지둥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 허이설은 어제처럼 꾸미지 않았다. 머리를 대충 묶고 책 두 권과 노트를 들고 뛰었다. 뛰다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펜이 떨어졌다. 허이설이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급히 올라가는 와중에 느긋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익숙한 흰 셔츠, 익숙한 얼굴...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도 많았지만 허이설은 그의 품에 안긴 듯 그의 차가운 우드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용제하가 땅에 떨어진 펜을 보고 있는 걸 보면 그녀도 본 게 분명했다. 허이설이 잠깐 멈칫한 그때 윤가을이 그녀를 끌고 계속 올라갔다. 용제하가 뒤에 있어 펜을 주울 생각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허리를 숙여 물건을 줍는다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들이 떠오를 것이다. 윤가을은 평소처럼 맨 뒷자리에 앉으려 했다. 용제하가 늘 뒷자리에 앉았고 허이설이 그와 함께 앉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허이설은 그녀를 앞쪽으로 끌고 갔다. 강의실의 중간과 뒤쪽에 학생들로 꽉 차 앞쪽에만 자리가 남아 있었다. 벽 쪽 자리 다섯 개는 늘 비어 있었다. 용제하가 항상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런 특권이 있었다. 여학생들은 기꺼이, 남학생들은 마지못해 양보했다. 강의실에 있는 모두가 허이설을 아는 터라 그녀가 윤가을을 데리고 앞자리에 앉자 약속이나 한 듯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그녀에게 쏠렸다. “오늘은 웬일로 제하 옆에 앉지 않는대?” “그러게. 평소엔 뻔뻔하게 제하 옆에 바짝 붙어 앉더니.” “정말 포기한 거야? 오늘 아침도 안 사 왔어.” “늦어서 못 산 거 아니야? 쟤 것도 안 사 왔어.” 평소 허이설은 용제하의 아침까지 챙겼다. 그가 먹지 않아도 말이다. “어제 제하를 찾으러 술집까지 쫓아갔다고 들었어. 누가 사진 올린 거 봤는데 저녁에도 같이 밥 먹었더라고. 근데 제하는 이설이 옆에 앉지도 않았대.” “사진 어딨어? 나도 좀 보자.” “어제 학교 게시판에 누가 익명으로 올렸어. 제하가 다희 옆에 앉아 있는 거 있지? 둘이 아무래도 사귀는 것 같아.” “다희랑 이설이 같은 기숙사잖아. 이거 완전 막장인데?” 종소리가 울렸다.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던 교수는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에 눈길도 주지 않고 소리쳤다. “거기 서!” 허이설은 책을 보다가 교수의 엄한 호통에 문 쪽을 쳐다봤다. 용제하가 서 있었다. 그의 늘씬한 몸매를 본 순간 허이설은 수많은 뜨거웠던 밤들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늦게 퇴근했다. 깊은 밤 허이설은 잠들었다가도 현관문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만 들리면 잠에서 깨곤 했다. 눈을 뜨면 어둠 속에서 소매를 풀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용제하가 보였다. 허이설은 이불을 젖히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입술로 그녀의 이마를 스쳤다가 겉옷을 옷걸이에 건 다음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 그의 키스는 부드러운 칼날처럼 사랑스럽고도 아팠다. 추다희와 해외로 떠난 그 사흘 밤, 그녀에게도 이렇게 키스했을까? 허이설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면서 속으로 교수가 용제하를 혼내길 바랐다. “오늘 지각하면 내일은 결석할 셈이야? 너...” 교수는 지각 기록을 적으려다가 용제하의 덤덤하고 느긋한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 “들어가.” 결국 가볍게 넘어갔다. 윤가을이 허이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편파적이야.” 허이설은 윤가을에게서 펜을 받아 책에 밑줄을 치며 용제하와 관련된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윤가을은 책을 덮고 작은 거울을 꺼내 앞머리를 만졌다. 허이설이 쳐다보다가 그만 거울에 비친 뒷자리의 용제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고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전과하면 수업할 때 용제하를 마주칠 일이 없겠지.’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담임 교수의 문자였다. [사무실에서 기다릴게. 수업 끝나면 복도 끝 사무실로 와.] 전과 얘기를 하려는 거라 생각하며 답장하려는데 또 문자가 왔다. [아, 맞다. 용제하도 같이 데려와.] 허이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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