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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조금 전까지 아침을 사러 가야 해서 수업이 빨리 끝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갑자기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용제하의 카톡을 삭제한 것도 후회됐다. 하루만 더 남겨뒀다면 지금 담임 교수의 말을 캡처해서 용제하에게 보냈을 텐데. 하지만 삭제한 바람에 직접 가서 전해야 했다. “가을아, 수업 끝나면 너 먼저 가. 교수님이 전과 얘기 좀 하재.” 윤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뭐 먹고 싶어? 내가 사 올게.” “그럼 만두 좀 사다 줘.” 종소리가 울렸다. 식사시간도 아니고 마지막 수업도 아니었기에 다들 서두르지 않고 느릿느릿 물건을 챙겼다. 허이설은 어쩔 수 없이 떠나려는 용제하를 불러 세웠다. 순간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움직임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봤다. “내가 뭐랬어. 허이설이 이렇게 빨리 포기할 리 없다고 했지?” “결국에는 불렀네.” “이번엔 또 무슨 수를 쓰려나?” 허이설은 용제하에게 다가가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제하, 유 교수님이 사무실로 오래.” 용제하는 책상에 놓인 책을 챙겼다. 책 사이에 펜이 끼워져 있었는데 그의 펜이었다. 허이설이 떨어뜨린 펜을 줍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주워줄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하긴 했지만 이내 부정했다. 지금 보니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게 맞았다. “쳇.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그냥 문자하면 될 일을 굳이 직접 가서 말하는 건 뭐야?” “제하랑 말이라도 더하려고 그러는 거지. 넌 참 아무것도 몰라.” “쯧쯧. 제하를 좋아하는 애는 많이 봤지만 허이설처럼 뻔뻔한 애는 처음 봤어.” 그들이 뭐라 하든 용제하는 허이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허이설은 앞장서 걸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교수님이 무슨 일로 제하를 불렀지?’ 두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담임 교수 유진서가 서류 하나를 들고 있었고 옆에 허이설의 전과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왔어? 앉아.” 유진서가 소파를 가리켰다. 용제하는 문 쪽 소파에 앉았고 허이설은 맞은편에 앉았다. 서로 고개를 들어도 마주치지 않게 일부러 용제하와 떨어져 앉았다. 유진서가 옆에 서 있었는데 어디에 앉을지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용제하의 옆에 앉으니 세 사람의 위치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유진서가 먼저 용제하를 보며 말했다. “이건 이번 국제금융대회 자료야. 우리 반에선 너희 둘을 내보낼 예정이야.” 한 담임 교수가 책임지는 반이 여러 개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학생은 몇 명 없었다. 허이설은 수석으로 입학했고 용제하는 수시 입학이었기에 이 둘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이번 국제금융대회에 그들의 반에서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두 명뿐이라 당연히 그들에게 돌아갔다. 이 얘기를 마친 후 유진서는 용제하에게 나가도 된다고 했다. 허이설의 전과는 개인적인 일이라 용제하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용제하가 나가자 허이설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저 그 대회 못 나가요.” “아, 맞다. 너 전과하겠다고 했지.” 유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 얘기 하려고 불렀어. 전과하려는 이유가 뭐야?” “금융학과에 관심이 없어요.” “그럼 왜 이 전공을 택했어?” “그땐 어려서 철이 없었어요.” 유진서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이 대회 아주 중요한 대회야. 참가하면 나중에 이력서도 더 빛날 거고 취업할 때도 훨씬 유리할 거야. 전과랑도 상관없으니 참가하는 걸 추천해.” “괜찮아요. 그냥 안 나갈래요.” 대회에 나가면 용제하와 엮일 수밖에 없었다. 허이설은 그게 싫었다. “알았어. 네 선택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부모님이 와서 사인한 다음에 기말고사만 잘 준비하면 돼.” “네, 감사합니다.” 허이설이 사무실을 나왔을 때 시간은 11시였다. 그녀는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일단 얘기는 끝났고 이제 부모님이 와서 사인만 하면 되었다. 휴대폰을 꺼내 아까 담임 교수와 대화하느라 놓친 문자를 확인했다. 윤가을의 문자가 여러 통 와 있었다. 누르자마자 가장 먼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0분 전 윤가을이 보낸 사진이었다. [대박. 나 아침 사러 갔다가 제하랑 다희 만났는데 다희가 금융대회에 누가 참가하냐고 물으니까 제하가 너랑 자기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다희가 자기도 대회 나가고 싶다는 거 있지? 제하가 설마 너 빼고 다희 넣는 거 아니야?]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강의동 밖 노란 은행나무 잎이 가득 떨어진 길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명은 훤칠했고 한 명은 귀엽고 아담했다. 나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사진 속에 용제하의 뒷모습만 보였고 추다희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울었는지 눈가가 새빨갰다. 허이설은 휴대폰을 넣고 벤치로 걸어가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윤가을의 이마를 톡 쳤다. “왜 이제야 와? 만두 다 식었어.” 허이설이 만두를 받아들었다. “괜찮아.” “내가 보낸 문자 봤어?” “봤어.” “안 불안해? 그 대회 되게 중요하잖아.” “애초에 나갈 생각이 없었어. 교수님한테도 말했어.” “안 나간다고?” 윤가을이 허이설을 보며 말했다. “왜? 참가 기회를 얻기 엄청 어렵다고 들었어. 우리 반에서 두 명밖에 못 나간다던데.”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너 진짜 제하 포기한 거야? 아까 다희가 제하 따라 학교 밖으로 나가는 거 봤어. 요즘 게시판에서도 둘이 사귄다고 난리야.” “별일 없으면 둘이 잘되겠지, 뭐.” 지난 생에서는 허이설이 용제하를 집요하게 쫓아다닌 바람에 추다희가 용제하에게 매달리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젠 허이설이 포기했으니 그녀도 용기를 냈다. ‘나도 참 억울해. 만약 다희랑 제하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애초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텐데.’ “휴. 식은 만두 먹지 말고 그냥 나가서 먹자.” “지난번 그 식당은 가지 말자.” 또 누굴 마주칠까 봐 겁났다. “알았어. 아 참, 어제 게임하는데 문상준이 나 초대한 거 있지?” 허이설이 쳐다보자 윤가을이 말을 이었다. “걔 게임 잘해서 같이 했거든. 그런데 마이크 켜놓고 너 진짜 전과할 거냐고 묻더라고. 제하랑 형수 말소리도 들렸어. 내가 신청서까지 썼다고 했더니 상준이 나보고 거짓말이라면서 네가 새로운 수법을 바꾼 거래. 계속 매달리던 방법이 먹히지 않으니까 밀당으로 바꿨다나 뭐라나. 너무 화가 나서 욕이란 욕은 다 해놨어.” “괜찮아. 믿든 말든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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