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이 차는 김씨 가문의 차였다.
김우연은 김씨 가문에서 이 차를 여러 번 봐 왔다. 이 승합차는 김병훈이 일부러 사서 김명헌의 등하교용으로 마련한 것이다. 공간이 넓어 요긴하게 쓰였지만 김우연은 단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폭염이 내리쬐든 장대비가 퍼붓든, 김명헌에게는 언제나 전담 기사와 전용 차가 있었다.
반면 김우연은 홀로 바람과 비를 맞고 뜨거운 열기를 버텨 학교에 갔다. 옷이 흠뻑 젖어도, 더위 먹어 비틀거려도, 누구 하나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이 승합차는 영원히 김씨 가문의 차, 김명헌의 전용이었다.
“이미 관계를 끊었는데, 왜 또 저를 찾죠?”
김우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며 차에서 내린 사람 하나하나를 훑었다. 오래도록 마주친 적도 없는 셋째 누나 김혜주까지 있었다.
“여기서 점잔 떠는 척하지 마. 스스로도 가식이라는 거 알지? 네 속셈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그 계약서 법적 효력 따위 없어! 결국 더 얻어 내려는 심보니 한판 해 보겠다는 거지?”
김슬기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굴리며 김우연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잔꾀라는 말을 듣고부터 그녀에게 김우연은 역겨운 존재였다. 생각 깊은 속내가 구역질 나게 만들었다.
“그만해!”
조서아가 김슬기의 말을 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김우연에게 다가가 머리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김우연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조서아 씨, 하실 말씀 있으면 짧게 하세요. 이 단지 사람들이 제가 김씨 가문과 연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요.”
김우연의 차가운 말투는 순식간에 현장을 덮었다.
분위기는 금세 영하로 떨어졌다.
“단지 사람들이 알면 어때서? 김씨 가문과 연관이 있는 게 너한테 수치라도 되니?”
김슬기가 버럭 내질렀다.
“조... 조서아 씨?”
조서아의 온몸이 퍼렇게 굳었다. 순식간에 말을 잇지 못했다.
‘호칭이 이렇게 바뀌다니?’
“어제는 우리가 너무 감정적이었어. 우리... 돌아가자. 다 한 가족인데 못 풀 게 뭐가 있니? 네가 안 좋은 버릇을 많이 묻혔다 해도...”
조서아는 이마를 찌푸리다가 스스로 또 실언했음을 깨닫고 말끝을 삼켰다.
그녀도 두 아들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김우연이 바깥에서 떠돈 세월이 15년, 핏줄을 잇는 느낌 말고는 아무 정이 자라지 않았다.
반면 김명헌은 달랐다. 그녀가 직접 키운 아이였다. 어린 날부터 하나하나 커 가는 것을 지켜봐 온 아이. 무엇으로 보나 김명헌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교양, 학식, 인품, 도덕,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조서아는 김우연이 하층 출신이라는 사실을 듣고, 손버릇이며 입버릇이며 마음가짐까지 의심했다. 고치면 다행이지만 김명헌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면 끝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눈앞의 김우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설득했다.
‘저 아이도 내 아이, 내가 책임져야 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너한테 잘 대하고, 바르게 가르칠게.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응?”
조서아는 긴장한 기색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의 손을 잡아끌려는 듯 간절한 눈빛이 대답을 기다렸다.
뒤편의 김씨 가문 자매들 또한 그의 반응을 주시했다. 손을 잡으면 곧 돌아오겠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몸을 낮춰 체면을 세워 줬는데 거절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김우연은 그 자리에서 고요히 서서 조서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듯, 냉랭한 눈빛으로 말이다.
“돌아가자.”
조서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울먹임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손을 내밀며 대답을 기다렸다.
“말씀 다 하셨어요?”
김우연은 무표정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곧장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모두의 예상을 깨는 움직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서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아들이 나를 거절했다고? 정말 그렇게도 모질단 말인가?’
“김우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사과하고, 명헌한테 사과하라고 하지 않은 것만도 체면을 세워 준 건데! 이 오그라들고 역겨운 몸짓은 누구 보여 주려고 하는데?”
김슬기는 더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혼을 내주고 싶었지만 김지유가 붙잡아 막았다.
“체면? 체면은 필요 없어요. 그런 가짜 체면 따위 줄 필요도 없고요. 사과는, 하하... 결국 지금도 내가 사과하기를 바라는 거였나요?”
김우연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상황 자체가 우스웠다.
‘관계 단절에 이 지경까지 와 놓고 아직도 끌어보겠다고? 머리가 그리 맑지는 않은 모양인데.’
“사과는 필요 없어. 정말 필요 없어.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나는 뭐든 다 들어줄게!”
조서아는 그가 멈추는 것을 보자 다시 가슴이 뛰었고 급히 외쳤다.
“그래요?”
김우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비웃음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김명헌을 내보내세요.”
“뭐라고?!”
모두가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어젯밤과 똑같은 태도라니.’
“우리가 너한테 사정하러 온 줄 알아? 엄마가 이렇게까지 몸을 낮췄는데, 이럴 때 물러서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어! 정상적인 머리라면 지금은 수락해야 해!”
김슬기는 속이 뒤집혀 소리쳤다.
“지금 정상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데요. 어제 분명히 말했죠. 저와 김명헌, 둘 중 하나만 그 집안에 남아 있을 수 있어요. 김슬기 씨는 병원에 가서 머리 검사나 해야 할 것 같네요.”
김우연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누구더러 미쳤다고 해!”
김슬기의 분노는 끓는 물처럼 치솟았다.
‘이게 감히?’
김씨 가문에서 지내던 3년 동안 그가 언제 이런 말대꾸를 했던가. 이제는 입까지 거칠어졌단 말인가.
“그래요, 제가 미친놈이네요. 그러니 제가 김씨 가문과 연관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김씨 가문은 한 무리의 미친놈이 되겠네요.”
김우연은 피식 웃으며 그런 모욕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을 천 명 베면 스스로도 팔백은 잃는다 해도 속은 시원했다.
“우연아, 다시 생각해 보렴. 정말 안 돌아오겠니? 엄마는 정말 네가 그리워. 그 아이도 엄마가 직접 키운 아이라 다 소중한 살덩이야. 쉽게 떼어 낼 수가 없어. 부디 나를 더 어렵게 만들지 말고, 나랑 함께 돌아가자. 우리 다시 시작하자.”
조서아는 울먹이며 눈시울이 젖은 채 간절함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서아 씨 마음은 이해해요. 집에서 키운 강아지한테도 정이 깊이 들죠.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한 줌의 관심도 준 적이 없었어요. 나는 강아지만도 못했어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김명헌이라면, 나와 얽힐 필요가 있나요? 각자 갈 길 가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요?”
김우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미련도 슬픔도 없었다.
그는 이미 김씨 가문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명헌이는 잘못한 게 없어. 왜 네가 있는 탓에 그 아이가 집을 떠나야 해?”
김지유가 미간을 잔뜩 모으며 차갑게 물었다.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 당신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여기서 선을 확실히 긋죠.” 어제 말했듯, 우리는 이제 서로 남.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김우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