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서예은은 문득 어제 박시우가 집에 왔을 때, 그녀의 핸드폰에 저장된 ‘박시우’라는 이름을 ‘남편'으로 바꿔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박시우는 이미 결혼한 사이에 이름으로 저장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서예은의 핸드폰을 빼앗아 강제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남편'이라는 글자가 핸드폰 액정에 떠오르자, 서예은은 가슴 깊이 따듯한 감정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통화버튼을 누르던 서예은의 목소리는 어느새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박시우의 깊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회사야? 퇴근하면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갈게. 같이 이사하자.”
박시우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왔다.
서예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네, 알겠어요.”
말을 마친 서예은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서예은이 고개를 들자, 주현진의 음산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분노와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서예은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비밀을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서예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왜 발신자 번호에 ‘남편'이라고 떠?”
주현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있었다.
서예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현진, 이건 내 사생활이야. 네게 보고할 필요 없잖아? 참 싱거워. 별걸 다 궁금해하고 그래.”
서지안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말을 꺼냈다.
“오빠, 너무 화내지 마. 언니는 분명 오빠를 열받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걸 거야. 언니가 결혼했을 리가 없잖아.”
주현진은 서지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아. 서예은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니 말도 안 돼. 분명 나를 화나게 하려는 수작이야.’
생각을 정리한 주현진은 냉정하게 말했다.
“서예은, 나를 화나게 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효과는 본 거 같아. 하지만 선은 넘지 말지?”
서예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서리가 서려 있었다.
“주현진, 넌 너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내가 누구와 결혼하던 그건 내 자유야. 계약서는 여기 둘게. 인수인계도 곧 시작할 거니까 답변은 3일 안에 해줘. 3일 이내에 답이 없으면 내 지분은 다른 사람에게 팔 거야.”
말을 마친 서예은은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주현진은 계약서를 찢어버리며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젠장! 서예은 요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도통 말이 통하지 않잖아!’
서지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언니가 정말 누군가를 만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돈을 요구하는 거고. 하지만 600억이라니 이건 너무 하잖아.”
주현진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600억은커녕 한 푼도 못 가져가게 할 거야. 떠나고 싶다면 빈손으로 나가게 만들어야지.”
서예은이 이렇게 돈을 밝힐 줄 생각도 못 했던 그는 서예은을 속물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실망감에 빠져있었다.
서지안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맞아. 정말 너무 탐욕스러워. 몇천만 원이었으면 몰라도...”
주현진은 서지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안아, 너는 정말 순수하고 착해. 정말 마음에 들어.”
“오빠, 걱정하지 마. 난 항상 오빠 곁에 있을 거야. 하지만 서예은이 저렇게 화를 내는데 디자인 시안을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서지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서예은의 컴퓨터 비밀번호를 알거든. 아까 확인해 보니까 거의 완성된 상태였어. 조금 있다가 서예은이 퇴근하면 다시 보자.”
주현진은 서지안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박! 오빠, 내가 새로 속옷과 잠옷을 샀는데 오빠가 좋아하는 핑크색이야.”
서지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역시 우리 지안이가 오빠 마음을 잘 알아. 그러면 오늘 밤에 직접 봐야겠네.”
서지안의 말에 방금까지 화가 치밀었던 주현진은 금방 마음이 녹아내려 다시 서지안을 끌어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사무실로 돌아온 서예은은 업무 인수인계를 준비했다.
일도 적었고 평소에도 팀원들을 믿고 맡겼기 때문에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녀는 필요한 사항들을 정리해 문서로 만들어 놓고 퇴근 시간이 되자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무엇보다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예상대로 서예은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지안이 그녀의 사무실에 슬며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서지안은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디자인 파일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승리의 미소를 띤 채.
“서예은, 역시 넌 어리석어. 이번 디자인은 내가 가져야겠어.”
그녀는 중얼거리며 USB에 파일을 옮겼다.
서예은은 어둠 속에서 서지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계획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 시간, 박시우의 차는 이미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차창 너머로 건물 입구를 바라보며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부터 서예은은 진짜 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밤이 깊어지며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선 서예은은 박시우의 차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열고 말했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서예은이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하자, 박시우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니야. 방금 왔어.”
서예은은 차에 올라타며 조용히 말했다.
“집으로 가요.”
박시우는 서예은의 집에 도착한 뒤 기사와 함께 짐을 차에 실었다.
원래 박시우는 이금희도 함께 살자고 제안했지만, 이금희는 혼자 있는 게 편하다며 거절하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신혼인 만큼 사이를 다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금희의 강한 의향에 박시우는 하는 수 없이 함께 사는 건 포기하고 이금희를 돌봐줄 가정 도우미를 구하기로 했다.
이후 박시우와 서예은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박시우의 집은 시내 중심 최고급 주거단지인 운정 아파트 단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이곳은 환경도 우아하고 보안도 철저했다.
“도착했어.”
차가 멈추자, 박시우가 말했다.
서예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시우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기사는 이미 짐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박시우는 서예은의 긴장한 표정을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
“여긴 우리 둘만 사는 곳이니까 긴장할 거 없어. 가정 도우미도 시간에 맞춰 들를 거야.”
서예은은 긴장감이 좀 덜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조마조마했다.
비록 법적으로는 부부였지만,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도 얼마 없었던지라 갑자기 한집에서 살게 되니 떨리는 건 당연한 거였다.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박시우는 차갑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함께하며 느낀 건 박시우는 소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거였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고 박시우와 서예은은 복도를 지나 넓은 현관문 앞에 섰다.
박시우가 두꺼운 원목으로 된 현관문을 열자, 넓고 밝은 거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인테리어는 모던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블랙, 화이트, 그레이 톤이 주를 이루고 따뜻한 느낌의 소품들로 포인트를 줬다.
통창 너머로는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마치 움직이는 그림 같았다.
“마음에 들어?”
박시우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묻자, 서예은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아요.”
박시우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달콤한 어조로 말했다.
“마음에 들면 됐어.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