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경성 번화가에 있는 멤버스 클럽.
어디를 둘러봐도 돈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은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가늘고 흰 손이 VIP룸 문손잡이에 닿은 순간,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예은? 질린 지가 언젠데.”
주현진은 담배를 붙여 가볍게 한 모금을 빨아들인 뒤 연기를 내뱉으며 경박한 어조로 말했다.
룸 안의 다른 사람들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
“하긴, 오래 사귀면 질릴 법도 하지.”
“그런데 현진아, 너 정말 그만둘 자신 있어? 어찌 되었든 3년 동안 정이라는 것도 있을 텐데. 그리고 초반에 너 엄청나게 쫓아다녔었잖아.”
“맞아. 게다가 서예은이 얼굴도 끝내주고 몸매도 연예인 못지않잖아.”
“자신이 왜 없어? 여자는 역시 애교 좀 부릴 줄 알아야지. 지안이처럼 유순하고 눈치 빠른 여자 말이야. 서예은이랑은 몇 번을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이제는 진절머리 나.”
주현진은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취기로 붉어진 두 눈은 어쩐지 나른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와, 대박. 너 이미 서지안이랑 만나는 거야? 근데 걔 서예은 의붓동생이잖아. 자매를 동시에 끼고 있는 거네?”
“하하. 서지안은 온화하고 애교가 많아. 얼굴도 귀엽고. 나한테 ‘오빠'라고 부를 때면 진짜 녹아버릴 것 같다니까.”
주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주씨 가문 도련님답네. 우리의 롤모델이야. 결국 여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그래도 서예은은 필경...”
룸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서예은은 문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안에서 흘러나온 대화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그녀의 귀에 전해졌고 주현진의 말은 칼처럼 그녀의 심장을 후벼팠다.
‘토끼도 굴 앞의 풀은 안 먹는다는데. 주현진, 나 몰래 서지안이랑 만나고 있었던 거야?’
서예은은 심호흡하고 문을 확 열어젖혔다.
시끌벅적하던 룸 안의 분위기는 서예은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방금 자신들이 했던 대화를 서예은이 들은 건 아닌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중 눈치가 빠른 송명철이 분위기를 바꾸려 이내 일어나 서예은을 맞이하며 말했다.
“예은아, 왔어? 어서 와서 앉아. 한잔해.”
서예은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주현진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현진, 우리 그만하자. 헤어져.”
말을 마친 서예은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와인잔을 들어 주현진의 얼굴에 확 끼얹었다.
그녀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 와인을 얼굴에 뒤집어쓴 주현진은 분노가 치밀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예은, 그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되는 거야.”
주현진의 말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항상 주현진이 가지고 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그는 연예인, 대학생, 심지어 회사 직원과도 만났었지만, 서예은은 항상 눈감아 줬었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날 때마다 머리를 숙이는 사람은 매번 서예은이었다.
그러니 주현진은 이번에도 서예은이 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라 확신했다.
그의 말에 서예은이 잠시 멈칫하자, 주현진은 그녀가 후회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서예은은 주저 없이 룸을 나섰다.
주현진의 표정은 즉시 얼음처럼 굳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현진아, 서예은 진짜 화났나 봐. 빨리 따라가서 달래줘.”
“따라가라고? 걱정하지 마. 두 시간도 안 돼 자기 스스로 알아서 돌아올걸? 달랠 필요 없어.”
주현진은 서예은을 마치 주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반려견처럼 대했고 그런 그의 태도에 친구들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귀는 동안 항상 서예은이 먼저 고개를 숙인다는 걸 친구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VIP룸을 나와 급하게 걸어가던 서예은은 갑자기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특유의 남자 향기가 코를 스치자, 서예은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남자는 검은 색 셔츠 맨 위 단추를 풀어 헤친 채로 우아한 쇄골을 드러냈고, 아래는 깔끔한 검은 슬랙스 차림이었다.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성숙미와 우아함이 느껴졌고 은은한 조명이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더욱 부각했다.
남자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서예은의 하얀 손가락이 갑자기 남자의 셔츠 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마치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는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남자의 강렬한 존재감에 정신이 흐려지기라도 했는지 방금 VIP룸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황당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주현진도 되는데 나라고 안될 게 뭐가 있어?'
“손 좀 놓지?”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못 놔요!”
앙칼진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 고양이처럼 남자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는 서예은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안 놓겠다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달콤한 독처럼 유혹과 위험이 서려 있었다.
“나랑... 결혼 할래요?”
두 눈이 붉어져 있던 서예은은 용기를 내어 말을 내뱉었다.
사실 그녀도 지금 자신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예은은 그저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었다. 충동적인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외할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늘 서예은이 결혼하길 바랐었다. 원래는 조만간 주현진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서예은은 외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고, 다시 주현진한테 돌아갈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남자라도 주현진보다는 나을 거로 생각했다.
‘손에 반지가 없는 거 보면 미혼일 테고 밑져도 본전인데 한번 도전해 보지 뭐.’
무엇보다 서예은은 그의 몸에서 나는 청량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여느 때보다 정신이 더 또렷해진 것 같았다.
남자는 서예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정교하게 다듬어진 그녀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와 순수함과 관능이 공존하는 그녀의 얼굴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이 여자였네.’
“확실해? 내가 누군지는 알고?”
남자의 목소리는 마법이라도 깃든 듯이 귓가를 간질였다.
서예은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박시우? 박시우가 왜 여기 있어?’
남자의 이름은 박시우였고 경성에서 이름난 재벌가 집안의 후계자였다.
신비로울 만큼 소문이 없는 그는 열다섯 살에 이미 손가락 하나만 까딱 흔들어도 경성 전체를 뒤흔들 만큼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뛰어난 외모와 능력, 가차 없는 수완으로 유명했던 그는 수많은 명문가 딸이 선망하는 대상이었지만 그를 건드린 사람들은 모두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한 마디로, 건드리면 안 되는 남자였다.
박시우의 냉철한 얼굴을 바라본 서예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사실 서예은은 박시우를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업무 협상 중 곤경에 처했을 때 박시우가 도와준 적이 있었고, 다른 한 번은 주현진과 함께 참석한 파티에서 그 남자가 박시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도 그는 음산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건드리지 말아야 했을 남자였다.
후회가 밀려온 서예은은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나를 알아본 건 아니겠지?’
하지만 주현진이 자신에게 한 모든 것이 떠오르자, 서예은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해요.”
용의 굴이든 호랑이 소굴이든 두려울 게 없었다.
서예은은 그저 자신한테 주현진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박시우가 믿지 않을까 봐 걱정된 서예은은 그를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왜? 너 남자 친구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어장 관리라도 하고 싶은 건가?”
박시우는 파티에서 그녀가 한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