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박시우의 말에 서예은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급히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다.
“아니에요. 그런 생각 전혀 없어요. 저와 주현진 사이에 정말 문제가 생겼을 뿐이에요. 할머니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제가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시는데, 전 그냥 결혼할 사람을 찾고 싶을 뿐이에요.”
‘박시우를 두고 어장 관리라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박시우는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그 남자를 떠날 자신은 있고?”
“바람둥이한테 무슨 미련이 남겠어요?”
서예은의 눈에는 깊은 혐오감이 스쳤다.
조금 전 룸에서의 충격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주현진이 했던 말을 떠올리니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린 듯했다.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던 박시우의 눈빛은 순간 겨울 호수에 비친 달빛처럼 차갑지만, 아름다운 빛이 감돌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해 보고 내린 결론 맞아?”
서예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쓰레기는 빨리 버리는 게 답이잖아요.”
박시우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뜨거운 그의 숨결이 예민한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후회하지 마.”
서예은은 얼굴이 달아오르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한참 뒤 그녀는 떨리는 눈꺼풀로 그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후회 안 해요.”
이미 이성은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좋아. 그럼,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가자.”
박시우는 번복할 기회도 주지 않으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서예은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이렇게 빨리요?”
“왜? 문제 있어?”
“아니에요. 집까지 좀 바래다줄래요?”
서예은은 집으로 가 주민등록증을 챙길 생각이었다.
곧이어 박시우는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서예은은 현재 그녀의 외할머니, 이금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빠 서민기가 그녀와 엄마를 버리고 내연녀였던 한지영과 함께 살게 되자, 한지영의 딸도 서지안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서예은의 엄마 심진서는 충격으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다가 나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실은 서예은한테 평생의 아픔이었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상처였다.
그녀는 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서민기를 한평생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서지안은 서예은보다 세 살 어렸고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주현진의 회사 F&W에 취직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열렸던 연말 파티에서 서지안의 독무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아마 그때 주현진과 서지안은 눈이 맞은 모양이었다.
F&W는 주얼리 회사였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명성이 급상승하며 업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서지안도 이 회사에 입사한 듯했다.
서예은도 F&W에서 일했지만, 그녀는 디자인팀에서만 활동했다.
평소 주현진과도 자주 마주치지 않았고 인사 채용에도 관여하지 않았던 서예은은 연말 파티에서 서지안이 회사에 들어온 걸 알게 되었지만 이미 서씨 가문과 연을 끊었던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현진이 서지안을 만나고 있었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주현진의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녀는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디자인 쪽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서예은은 전국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에서 금상을 탄 적도 있었다.
주현진과 사귄 뒤로 F&W를 세웠고 이름도 두 사람이 고심하게 생각한 끝에 지은 거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우습게 느껴졌다.
“도착했어. 오늘에는 늦었으니, 할머니는 다음에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뵙도록 할게.”
박시우의 깊게 가라앉은 중저음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흘러나왔다. 서예은은 잠시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 아침에 사람 보낼 테니까 직접 구청으로 와.”
박시우가 덧붙였다.
“알겠어요.”
서예은은 순순히 대답했다.
박시우의 차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꿈꾸는 듯한 기분을 안고 살금살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금희는 이미 잠들었고 핸드폰을 열어보니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주현진과 그녀의 절친 장은주에게서 온 것이었다.
장은주는 서예은의 대학 동창이자 룸메이트였고,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그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다.
장은주는 현재 한 회사에서 영업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다.
서예은은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장은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은아, 괜찮아?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너 지금 어디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집이야.”
서예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주현진이랑 무슨 일 있어? 조금 전에 나한테 전화해서 네가 어디 있는지 못 찾겠다며 안절부절못하던데?”
장은주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음...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흥분하면 안 돼. 알았지?”
서예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응? 무슨 일인데?”
잠시 멈칫하던 장은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았어. 흥분하지 않을 테니까 말해 봐.”
“나 주현진이랑 헤어졌어. 이제 그 사람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그리고 주현진은 지금 서지안이랑 사귀고 있어.”
서예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뭐? 주현진 그 개자식이 서지안 그년이랑 사귄다고?”
갑자기 높아진 장은주의 목소리에 서예은은 재빨리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장은주는 폭발한 듯이 말을 쏟아냈다.
“서지안 그년은 진짜 얼굴이 왜 그렇게 두껍다니? 세상에 남자가 다 죽었대? 그래도 명색에 네가 언니인데 하필 네 남자 친구를 건드려? 주현진도 마찬가지로 진짜 개자식이네. 하필 왜 서지안인데? 너랑 서지안이 어떤 사이인지 뻔히 알면서 그딴 짓을 한 거야? 전에 서지안이 F&W에 입사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난 그년이 무슨 꿍꿍이가 있겠다고 생각했어!”
“은주야, 진정 좀 해.”
서예은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마음 한구석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마웠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두 사람 그냥 내버려둘 거야? 예은아, 너 우리 학교에서 퀸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고 너 좋다는 남자 널리고 널렸어. 하필이면 주현진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를 좋아해서 회사까지 일으켜 세워줬더니, 이게 뭐야? 자기가 잘난 줄 아나 봐? 네 뒤통수를 다 치고! 그리고 그 서지안은 또 뭔데? 평소에는 그렇게 순수한 척하더니 내연녀 핏줄을 닮기라도 했나 봐? 그 집안 여자들은 임자 있는 남자를 뺏는 게 취미래? 그 여우 같은 실체를 다 까발려야 하는 거 아니야?”
“까발리면? 내가 무능해서 남자를 빼앗겼다는 소문밖에 더 있어?”
서예은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미 내 마음은 정리가 다 됐어.”
“그럼 이렇게 그냥 넘어가겠다는 거야?”
장은주는 분노로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전부 다 갚아줄 거야. 그리고 똥차가 지나가야 새 차가 오는 법 아니겠어?”
서예은은 이제 곧 참가하게 될 주얼리 디자인 공모전이 떠올랐다.
서지안도 이 공모전을 통해 한방에 이름을 알리려는 듯했다.
며칠 전 주현진이 슬쩍 공모전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서예은은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아마 서지안을 디자이너로써 이름을 날리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고, 그러려면 공모전에서 상을 타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주현진과 헤어졌다는 것도 충격적인 일이라, 서예은은 아직 박시우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장은주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건 그래. 그럼,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건데?”
장은주가 물었다.
“충분히 갚아주고 회사를 나와야지.”
서예은은 이제 역겨운 사람 옆에서 그리고 더러운 회사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좋아! 나는 네 편이야.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야 해. 알았지?”
장은주가 당부했다.
서예은은 대학 시절 학교의 아이콘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그야말로 천하무적 같은 존재였다.
사랑에 눈이 멀지만 않는다면 서예은은 정말 완벽한 여자였다.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서예은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장은주와의 통화를 마친 서예은은 주현진의 연락을 받기 싫어 바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생각지도 않을 거라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