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빌어먹을. 강이현. 돈 어디다 숨겼어?”
“아무리 밟아도 끄떡없네. 야. 오늘 이 새끼 진창 밟아주고 절름발이 에미랑 밥 빌어먹게 하자.”
“퉤. 엘리트 모범생? 끽해야 노름꾼의 핏줄이잖아. 더러운 버러지 같으니라고.”
쇠 파이프로 살을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골목을 꽉 메웠다.
[띵. 키 포인트 촉발. 공략 목표인 강이현 위기]
[즉시 구출 임무 실행: 따뜻한 보살핌과 사심 없는 도움으로 호감도를 올리세요]
골목, 유채하가 차가운 눈빛으로 일방적인 구타를 방관했다.
강이현, 미래 정권의 신예가 될 사람이지만 지금은 구석에 웅크린 채 때려도 그저 맞고만 있었다. 하얀 셔츠는 어느새 발자국으로 뒤덮였고 피가 빗물과 섞여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시스템 알림: 앞 99명의 공략자들이 이 세계에서 펼친 임무는 모두 실패로 종결하였습니다. 반드시 시스템의 지시에 따라 부드럽고 선량한 캐릭터로 남으세요, 규칙을 어길 시]
유채하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지워버린다고?
시스템은 일 초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유채하가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타오른 빨간 불빛이 유채하의 정교한 옆모습을 반짝 비춰줬다.
“잘 들어. 앞에 그 멍청한 것들은 어떻게 죽었는지 관심 없어. 하지만 이제는 내 순서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얌전히 내 말을 듣는 거야.”
[시스템 경고: 유채하 님, 매우 심한 반사회적 경향이 보임]
유채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골목 깊숙한 곳, 양아치가 강이현의 머리채를 잡고 축축한 벽에 힘껏 밀어붙이며 음침하게 웃었다.
“엘리트니까 두 번 말 안 한다. 오늘도 아버지 노름빚 못 갚으면...”
차가운 쇠 파이프가 강이현의 손목에 닿았다.
“이 형님이 다시는 연필 잡지 못하게 장식품으로 만들어준다.”
피가 강이현의 입가에서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목소리만큼은 매우 차분했다.
“한 주일만 더 주세요.”
“한 주일? 하. 내가 너무 봐줬다. 그렇지?”
양아치가 폭주하며 쇠 파이프를 높이 들어 올렸다.
[긴급 알림: 유채하님, 즉시 폭력을 막고 남자 주인공을 구출하세요. 대사는 이미 준비했습니다]
[대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떻게 사람을 짐승 대하듯이 해요? 말투는 부드러우면서도 굳세어야 합니다]
‘구출?’
군림하는 포식자인 유채하는 허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유채하에게 궁지에 몰린 사슴을 구출하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야. 너희들. 너무 시끄러워서 담배를 못 피우겠네.”
유채하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X발. 뭐야. 저리 썩 꺼지지...”
양아치가 고개를 돌렸다가 입이 떡 벌어졌다. 앞에 선 여자는 까만 머리카락이 비에 흠뻑 젖었고 입술은 이상하리만큼 빨갰는데 온몸으로 뿜어내는 우아한 아우라는 더러운 골목과 어울리지 않았다.
“강이현?”
유채하가 오만한 표정으로 강이현을 내려다보며 빨간 입술을 열었다.
“쯧. 가엽기도 해라.”
강이현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행색이 말이 아니었지만 눈동자에 타오르는 불길은 꺼질 줄을 몰랐다.
[시스템 엄중 경고: 행위가 캐릭터의 부드럽고 선한 이미지를 벗어났으므로 즉시 수정, 즉시 수정 바랍니다. 어길 시 징벌 기제가 촉발됩니다]
‘수정? 징벌?’
유채하가 콧방귀를 뀌며 나쁘지만 매혹적인 말투로 말했다.
“기회 줄 테니까 알아서 기어와. 넌 앞으로 내 멍멍이가 되는 거야.”
유채하는 마치 눈에 거슬리는 쓰레기를 처리하듯 손가락으로 벙찐 표정의 양아치들을 툭툭 쳤다.
“그러면 이 피라냐 같은 것들 내가 처리해 줄게.”
[유채하님, 시나리오대로 사람을 구출하세요]
시스템이 머릿속에서 발악했지만 유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강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채하가 입을 열었다.
“왜? 엘리트. 그 정도의 자존심도 못 내려놓겠어?”
강이현의 속눈썹이 빗속에서 파르르 떨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빗물과 섞여 아래로 잘도 미끄러졌다.
“왜... 저예요?”
강이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불쌍한 만큼 총명하니까?”
유채하가 가볍게 웃었다.
“자료를 봤거든. 강이현. 아버지는 노름빚을 갚지 못해 자살했고 어머니는 장애를 얻고 치료 중이고. 아르바이트하면서까지 일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더라? 쯧쯧. 눈물 없이는 못 봐주겠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하도 많이 봐서 재미없어.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빈다면 모를까.”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강이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스템은 귀청이 째질 듯 알람을 울렸다.
[시나리오 이탈, 시나리오 이탈]
“3초 줄게.”
유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힐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밟았다.
“3.”
“2.”
허리를 바짝 숙인 강이현이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멍멍이처럼 구정물을 헤치고 유채하에게 기어갔다. 비가 어찌나 세게 내리는지 유채하의 웃음소리마저 축축하게 느껴졌다.
“좋아.”
유채하는 고래를 돌려 매서운 눈빛으로 양아치들을 노려봤다.
“남은 돈은 내가 갚을 테니까 당장 꺼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양아치들이 유채하에게 달려드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가 앞길을 막았고 잘 훈련받은 보디가드들이 유씨 가문 휘장을 꺼내 들었다.
“유... 유씨 재단?”
순간 크게 놀란 양아치들이 그대로 도망갔다.
“가자.”
잠깐 사이에 골목은 강이현의 답답한 숨소리만 남았다. 유채하는 구둣발로 강이현의 어깨를 밟아 쳐든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강이현의 머리를 다시 구정물에 처넣었다.
“착하지.”
유채하는 서서히 발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이라고 불러.”
빗물이 하얗게 질린 강이현의 얼굴을 사정없이 씻어내리자 피로 물들었던 속눈썹이 세차게 떨렸다. 핏줄 서린 차가운 눈동자는 유채하를 마주한 순간 꺼져 들어가는 촛불처럼 점점 어두워졌다.
“주인님...”
유채하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발을 걷었다.
“그 자세 잘 기억해. 오늘부터 너는 쭉 그 자세여야 할 거야.”
강이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를 처박은 탓에 구정물이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네...”
유채하가 손을 내밀자 보디가드가 핸드폰을 건넸다. 어디론가 전화한 유채하는 상처투성이가 된 강이현의 등을 힐끔 쏘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물에 빠진 멍멍이가 있는데 처리가 필요해. 잘 씻겨서 치료해 놓아.”
“빚진 돈이 얼만지 조사해서 본전과 이자를 한꺼번에 청산해. 그리고 그 새끼들에게 알려. 앞으로 이 사람은 내 소관이라고.”
수화기 너머로 공손하면서도 간결한 대답이 들렸다.
“네. 아가씨.”
유채하가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타고 온 마이바흐로 걸어갔다. 차에 올라타자 가죽 시트가 가녀린 몸을 휘감았고 차 안을 가득 메운 우드 향이 골목에서 맡은 피비린내를 잊게 했다.
시스템이 머릿속에서 항의했다.
[정해진 방향을 완전히 이탈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병원으로 데려가서 살뜰히 보살피며 천천히 감화하는]
유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닥쳐. 내 방식이 내키지 않으면 지금 바로 나를 지워버려도 좋아.”
시스템은 한동안 조용했다.
유채하도 시스템이 그럴 용기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앞서 겪은 99번의 실패로 이미 부드러움은 헛수고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끊기기 시작했다.
[이... 이상합니다]
[공략 진척: 10%]
[이럴 수가, 시나리오만 보면 고작 1% 미만이어야 하는데]
유채하가 고개를 살짝 젖히자 창문에 가히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옆모습이 비쳤다.
“허.”
유채하는 패닉에 빠진 시스템이 내는 노이즈를 듣고 경멸에 찬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랬지.”
“구출보다는... 조련이 더 재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