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8장

염정훈은 서정희가 다른 남자 밑에 누워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온몸에 피가 솟구치고 무서운 살기가 돌았다. 소희의 방울소리가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정원정이 기뻐하며 소희를 향해 달려오다 소희 옆에 서있는 남자를 알아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원정은 연정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이 환자였어요?” “응. 말하자면 길어.” 서정희가 정원정에게 눈짓을 하자 정원정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염정훈은 이왕 시작한 연기, 끝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Vanessa, 손님 왔어요?” 정원정이 웃었다. “누가 손님이죠?” 염정훈은 모르는 척 물었다. “이 분 저한테 적대적인 것 같은데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서정희가 차갑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이예요. 여긴 왜 왔어요?” 소희가 손짓을 하자 서정희는 그제서야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눈 아파요?” “네. 선생님이 가고 나서 갑자기 따끔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소희보고 데려다 달라고 했어요.” 서정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따라오세요.” 앞장 서서 걷던 서정희는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나 다시 돌아와 손가락으로 그의 허리띠를 잡아 끌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정원정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방으로 돌아와 서정희가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요.” 염정훈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그 큰 몸이 나무 침대에 내려앉자 삐걱거리며 소리가 났다. 서정희는 그의 앞에 서서 눈에 감긴 거즈를 한 겹 씩 풀어냈다. 그러고는 눈꺼풀에 남아있는 약을 수건으로 가볍게 닦아냈다. “눈 떠봐요.” 염정훈이 협조적으로 나왔다. “빛이 보이나요?”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염정훈이 머리를 저었다. “아뇨.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여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아파요?” “네.” 서정희가 뭔지 모를 약을 가져와 눈에 떨구어 주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호호 불기 시작했다. 눈이 시원해지고 머리도 맑아졌다. 눈 뿐만이 아니라 두통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