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6장

예전에 그렇게 시크했던 남자는 이 순간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비록 남자이긴 하지만 안정감이 필요해. 결혼해서 그런 안정감을 갖고 싶어.” 서정희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내게 결혼은 안정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족쇄야.”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손을 들어 그의 입술에 묻은 립스틱을 지웠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과 같은 날이면 충분해.”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을 이었다. “정훈 씨가 발라줘.” 차밖에는 각국 외빈들이 모두 서 있었다. 앞에 있던 신동우는 주위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지만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는 배윤에게 사람을 데리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리고 본인은 염정훈의 차 앞으로 갔다. 진영을 비롯한 경호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차 옆에 서 있었다. 신동우는 참다못해 차 문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눈앞에 이런 장면이 펼쳐질 줄 몰랐다. 평소 그와 맞서던 염정훈과 사뭇 달랐다. 손끝은 서정희의 턱을 살짝 잡고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립스틱을 열심히 발라주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몸짓은 마치 서정희를 신으로 모시듯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서정희는 입을 달싹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정훈 씨, 예뻐?” 이 웃음은 신동우의 혼마저 앗아갈 뻔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웃음이 있을 줄 몰랐다. 분명 요염하고 화려한 얼굴이지만 눈은 보석처럼 순수하고 깨끗했다. “우리 정희가 제일 예쁘지.” 서정희는 그제야 신동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는 서먹함이 가득했다. “죄송해요. 방금 립스틱이 지워져서요. 시간을 너무 지체하지는 않았죠?” 신동우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아니에요.” 왜 이 여자 앞에만 오면 저절로 성깔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염정훈은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내렸다. 서정희에게 팔을 건넨 후에야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마치 하늘이 만들어준 한 쌍의 원앙처럼 매우 눈길을 끌었다. 신동우는 서정희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사모님, 오늘은 제 부하 직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