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화

이유라면 그 주인공이 명량하고 어여쁜 18세 소녀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난 커리어우먼도 아닌 돌싱에 죽집을 하는 출신도 외모도 평범한 데다가 나이도 세 살 더 많은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배수혁의 눈빛은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녁 9시, 집으로 들어온 배수혁은 여전했다. 흐트러짐 없는 슈트가 원래도 차갑고 도도한 아우라를 더 돋보이게 했다.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던 성아린은 배수혁이 가까이 다가서자 면전에 사진을 촤촤락 뿌렸다. “배수혁. 설명해.” 배수혁이 멈칫하더니 몸을 숙여 바닥에 흩뿌려진 사진을 한 장씩 주워들었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지금은 부드럽게 사진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덤덤한 눈빛으로 성아린을 바라봤다. “설명할 거 없어. 네 말이 맞거든. 이 사람 사랑해.” 성아린은 보이지 않는 손에 목이라도 졸린 것처럼 숨이 올라오지 않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랑한다고?” 성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는? 배수혁. 16살에 고백하면서 뭐라고 했어? 달빛 아래서 귀까지 빨개져서는 평생 나만 사랑하겠다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잖아.” 배수혁은 흥분한 성아린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그저 피곤해 보였다. “그래. 그랬지.” 배수혁이 입을 열었다. 세상 덤덤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몹시 잔인했다. “그런데 아린아. 지금까지 너 사랑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연애 4년, 결혼 5년, 9년이야. 9년 동안 네가 화나면 누가 잘못했는지를 떠나서 매번 내가 너 달래줬지? 마음에 드는 가방이 있으면 당장 외국으로 날아가서 사다 주고. 다른 여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싫다는 이유로 3년을 함께한 비서를 해고하고. 야밤에 성서구의 디저트가 먹고 싶다고 하면 이튿날에 중요한 회의가 있어도 먼 거리를 마다하고 냉큼 일어났지...” 배수혁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토해냈다. 성아린이 달콤하다고 생각했던,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끝내는 하소연의 증거가 되고 말았다. “너를 위해서 내 자존감을, 어쩌면 내 자아까지 잃어버렸어. 하지만 아린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힘들어.” 배수혁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초점 없는 눈동자로 말했다. “3달 전에는 네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깜빡했다고 화냈지? 아무리 달래도 풀리지 않아서 밖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어. 그래도 어떻게든 너 달래보겠다고 이튿날 아침에 그 집 망고 크림 팬케이크를 사러 가다가 위가 아파서 수아가 하는 죽집 앞에 쓰러졌지. 그런데 수아가 약을 주면서 죽을 끓여줬고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경련이 날 정도로 아픈 위를 문질러줬어.” 이렇게 말하는 배수혁의 목소리에 성아린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랑에 가까운 부드러움이 녹아있었다. “거기서 나는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따듯함을 느꼈어. 그날이 9년 동안 제일 편안하고 부담 없는 하루였어. 그동안 느꼈던 피로가 싹 가실 만큼.” 성아린은 머리가 윙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고작 죽 한 그릇에 9년 동안 이어온 우리의 감정을 저버리고 마음이 흔들린 거라고?” 배수혁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동자로 성아린을 바라봤다. “아린아, 너 예뻐. 지금까지 여러 여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너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었어. 게다가 우수하지. 피아노 연주도 잘하고. 나는 그런 너를 우러러보면서 늘 조심스럽게 달래야만 했어. 수아는 평범해. 우수하지도 예쁘지도 않아. 근데 나를 걱정해 준다? 위가 아프면 따듯한 죽을 끓여주고 피곤해 보이면 안마도 해줘. 수아랑 있으면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평온함과 소속감을 느끼게 돼.” 소속감이라는 말에 성아린은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그렇다면 9년 동안 함께 산 이 집은 뭘까?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너랑 이혼 안 해.” 배수혁은 다시 냉철하고 이성적인 상인으로 돌아왔다. “주성은 너처럼 예쁘고 우수한 안주인이 필요해. 게다가 너희 부모님 장례식에서 약속까지 했잖아. 너 평생 보살피겠다고. 그동안 함께해온 정이 있으니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않을게.” 그러더니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선을 그었다. “다만 앞으로 너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수아랑 뭘 하든 상관할 생각하지 마. 약속을 저버린 건 사과할게. 그동안 너를 사랑해 준 걸 생각해서라도 수아 탓은 하지 마. 차라리 나를 탓해. 수아랑은 아무 상관 없어.” 이 말을 뒤로 배수혁은 하얗게 질린 성아린의 얼굴을 무시한 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성아린은 매정한 뒤태를 보고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9년 전, 성아린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퀸카였고 배수혁은 우아하면서도 차가운 킹카라 사귀기 전부터 다들 너무 잘 어울린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배수혁도 성아린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성아린은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싸우던 부모님을 보며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게 아침을 날라다 바치고 아프면 담장을 넘어 약을 사다 주고 괴롭힘을 당하면 앞장서서 보호해 주는 배수혁을 보고 굳게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사귀고 난 뒤로 배수혁의 사랑은 날로 뜨거워졌다. 하지만 불우한 가정이 가져다준 그늘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어릴 적부터 혼자에 익숙했던 성아린은 뭐든 혼자 이겨내려 했다. 그러다 보니 배수혁이 번호를 따여도 성아린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날 뿐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분명 속은 이미 질투로 범벅이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다 수능이 끝나고 맞은 첫 방학에 성아린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님을 먼저 보내게 되었다. 큰 슬픔에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고 뒤처리며 장례식이며 혼자 끝냈다. 하필 그때 졸업 여행을 떠났던 배수혁은 어디서 들었는지 그길로 장례식장에 달려왔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장례식장에 쳐들어온 배수혁은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상복을 입은 성아린을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러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고 차가운 성아린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린아, 나 봐봐. 나 수혁이야. 너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내가 왔으니까 이제 울어도 돼. 투정 부려도 돼. 너 혼자 짊어질 필요 없어. 질투 나면 캐묻고 기분 나쁘면 성질 부리고. 그 무엇도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는 없을 거야. 나는 영원히 네 편이고 너랑 함께야. 내 말 들려?” 순간 성아린이 그동안 어렵게 쌓아왔던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졌다. 배수혁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성아린은 모든 슬픔과 무력감, 그리고 억울함을 다 토해냈다. 거북이처럼 늘 움츠려있던 성아린을 딱딱한 등껍질에서 꺼내주고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은 배수혁이었다. 하여 9년 동안 성아린은 표현하는 법을 배웠고 투정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되었고 여느 사랑받는 여자들 못지않게 배수혁에게 요구하고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그 말, 영원히 네 편이고 너랑 함께라는 말을 믿고 말이다. 하지만 9년이 지난 지금 배수혁은 이제 지쳤다고 말한다. 성아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통에 몸부림치며 엉엉 울었다. 전에는 성아린이 눈시울만 붉혀도 마음 아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부드럽게 키스해 주던 남자는 이제 없다. 분명 사랑을 먼저 꺼낸 사람은 배수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도 배수혁이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성아린은 이 상황을 배수혁의 일시적인 방황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이튿날 성아린은 정교하게 화장하고 지수아의 죽집을 찾아갔다. 촌스럽다고 해도 좋을 여자가 분주히 돌아치는 걸 보고 성아린은 거액의 수표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지수아 씨, 배수혁에게서 떨어져요. 이 돈이면 지수아 씨와 아이가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거예요.” 수표를 본 지수아가 멈칫하더니 눈시울을 붉혔지만 받지는 않았다. “사모님... 떠날게요. 그러니까... 수혁이 너무 몰아가지 마세요.” 그러더니 성아린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둘러 물건을 정리했다. 성아린은 그런 지수아를 보며 마음이 후련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답답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성아린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지수아가 가는 길에 차 사고를 당해 목숨을 건졌지만 뱃속의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이전 챕터
1/29다음 챕터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