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성아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차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지수아가 이미 배수혁의 아이를 가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배수혁과 결혼하고 5년, 한 번도 잊지 않고 피임해 지금까지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다.
‘지수아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한 주가 지나고 배수혁이 돌아왔다. 예상했던 질책과 고함은 없이 그저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로 뚫어져라 쳐다보던 배수혁은 갑자기 난폭하게 성아린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배수혁. 뭐하는 거야?”
깜짝 놀란 성아린이 몸부림쳤지만 배수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성아린을 침대에 확 밀치고 위로 올라타더니 다소 절망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그날 밤이 지나고 한 달간 배수혁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회사로 나가지 않는 건 물론이고 지수아도 상관하지 않은 채 낮이고 밤이고 성아린의 몸을 갈취했다. 그러기를 하루에도 여러 번, 쉬지 않고 하는 것이 마치 자학에 가까운 처벌 같았다.
성아린은 몸이 축나는 것에 비해 굴욕이 더 컸지만 한편으로는 비굴하게 기대하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또 어쩌면 정신을 차려서 이런 방식으로 지수아를 잊고 예전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이다. 하여 묵묵히 견뎌내던 성아린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몰려오는 구역질에 마음이 불안해 몰래 병원에 가 검사해 보니 임신이었다. 성아린은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며 기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아이로 우리 결혼을 만회할 수 있을지 몰라.’
다만 현실은 성아린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임신한 소식을 들은 배수혁은 예상했던 것처럼 흥분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결과지를 들여다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수혁이 보디가드에게 눈짓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명령했다.
“사모님 5층에서 던져버려.”
성아린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수혁.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 뱃속에 네 아이가 있다고.”
성아린을 바라보는 배수혁의 눈동자에는 사랑이 아닌 미움으로, 기쁨이 아닌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수아가 사고 나던 날 내 아이를 품고 있었던 거 몰라? 네가 우리 사랑의 결실을 망가트렸어. 그러니까 뿌린 대로 거둬야지.”
그제야 성아린은 배수혁이 한 달간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다. 지수아가 아이를 잃고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지수아를 이 정도로 사랑한다고?’
성아린은 뭐라도 따져 묻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목구멍이 시멘트로 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기골이 장대한 보디가드 두 명이 아무 표정 없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성아린의 팔을 하나씩 잡았다.
“아니. 배수혁. 너 이러면 안 돼.”
성아린의 절규에도 배수혁은 냉정하게 몸을 돌린 채 꿈쩍하지 않았다. 보디가드는 체면 따위는 봐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성아린을 5층으로 끌고 가 아래로 훅 밀어버렸다.
“아악.”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몸 아래쪽이 뜨거워졌고 이내 물감이 퍼지듯 옷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아파. 너무 아파.’
의식이 꺼져들어가기 전 성아린은 16살 되던 해 배수혁이 달빛 아래서 귀까지 빨개져서는 고백하던 걸 떠올렸다.
“아린아, 평생 너만 사랑한다고 약속해.”
차가운 눈물이 성아린의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절망적이게도 이제야 처절하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녀를 9년간 사랑한 배수혁이 이제는 정말 내려놓았다는 걸 말이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병원이었다. 아랫배는 여전히 평평했지만 아이는 떠나고 없었다.
성아린은 울지도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저렸다가 시리기를 반복했다. 핸드폰을 꺼내 별장 도우미에게 전화한 성아린은 온기 없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서재 서랍에서 단목으로 된 상자 좀 가져다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상자를 들고 왔다. 열어보니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다른 내용은 없이 달랑 배수혁의 사인만 보였다. 이건 성아린이 18살 되던 해에 배수혁이 준 생일 선물이었다. 앞으로 뭘 원하든 다 내어줄 거라는 말에 성아린은 쓰기가 아까워 신줏단지 모시듯 잘 모셔뒀다. 사랑의 증표였던 이 종이는 결국 9년 동안의 사랑을 끝내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성아린도 배수혁이 없으면 못살 정도로 병들지는 않았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성아린이 얻은 건 절망, 그리고 뒤따라온 현실이었다. 어쩌면 배수혁을 만나기 전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던 성아린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