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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임지유는 남편 차현우 몰래, 집에서 돌보던 소녀 지아를 해외 명문 음대로 보냈다. 소식을 들은 차현우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차현우는 임지유가 고의로 지아를 자기 곁에서 떼어내 몰래 해외로 보냈다고 믿었다. 그날 밤 차현우는 다섯 살 된 두 사람의 아들 차세준을 북극행 크루즈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나갔다. 배가 영해를 벗어나 공해로 접어들자 차현우의 비서는 아이를 번쩍 들어 난간 밖으로 내걸었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얇은 팔, 얼음장 같은 바람, 갑판을 가르는 울음 소리... 모든 것이 임지유의 가슴을 후벼 팠다. 차현우가 난간 너머 바다를 가리키며 낮게 말했다. “지아를 5분 안에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세준이를 바다에 빠뜨릴 거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임지유의 머릿속에 지난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멀리서 차현우를 5년 동안 짝사랑하던 시절, 아무런 명분도 바라지 않고 그늘처럼 곁에 서 있던 날들. 졸업과 동시에 정해진 혼담을 뿌리치고 구청으로 달려가 도장을 찍던 오후. 임신 소식에도 끝내 인정받지 못해 집안과 등을 지고 나와, 차세준을 낳고 둘이서 살림을 꾸리던 시간. 스무 살 생일 파티가 있던 그 밤, 집에 들인 친구의 조카 지아를 바라보는 차현우의 눈빛에서 임지유는 처음으로 애써 감춘 다정함을 알아챘다. 끝내 잊고 싶었던 어느 밤의 장면까지 할퀴듯 스쳐 갔다. 그때 임지유의 시선이 멈췄다. 차현우의 손목에 늘 덜그럭거리던 거의 20년을 차고 다니던 염주가 사라졌었다. 한때는 임지유가 손끝으로 스치지도 못하게 하던 그것. 지금 그 염주는 지아의 오른쪽 발목에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차현우의 눈빛이 얼음처럼 식었다. “임지유, 마지막으로 묻는다. 지아는 어디 있어?” 바닷바람에 목이 따갑게 마르며 귓가로 세준의 울음이 밀려왔다. “엄마... 살려줘요...” 거센 바닷바람이 임지유의 뺨을 후려치자 살을 에듯 아프고 뜨거웠다. 임지유가 변명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차현우가 쏘아붙였다. “임지유,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들 셈이야?” 숨이 가슴 밑에서 억눌려 올라오지 않았다. 임지유는 젖은 눈으로 차현우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차현우, 차세준은 당신 친아들이야. 아이 목숨으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 차현우는 차갑게 말했다. “지아는... 내게 목숨 같은 존재야.” 그 말에 임지유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지아가 그의 ‘목숨’이라면 임지유와 차세준은 그의 무엇일까. 차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아만 돌아오면 넌 여전히 내 아내야.” 임지유는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차현우, 지아 때문에 정말로 우리 아이를 해치진 못해. 게다가 난 그 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러나 차현우의 목소리는 더 낮고 단단해졌다. “5초 줄게. 행방을 말하지 않으면 세준이는 고래 밥이 될 거야.” “5, 4, 3... ” 신호를 보내려 손을 드는 걸 보는 순간, 버티던 임지유가 무너졌다. “지아는 M국의 BK 음대에 있어.” 임지유는 말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정말 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아들까지 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차현우는 곧장 전화를 들었고 조급함이 묻은 목소리가 짧게 흘렀다. “헬기 대기시켜. M국으로 간다.” 그는 더 이상 임지유를 쳐다보지 않았고 시선은 휴대전화 화면에만 박혀 있었다. 임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모래를 한 줌 움켜쥐었다. 지난 십 년, 임지유는 조용히 차현우의 뒤편에서 그의 삶을 떠받쳤다. 연구도 성과도 그의 프로젝트마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구멍을 메웠다. 차현우가 맨손으로 회사를 일으켜 연구실 밖으로 걸어 나와 ‘대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도 임지유가 밤을 새우며 그가 바라던 약을 끝내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약이 성공하면서 그들의 제약사 차진 그룹은 차영 그룹과 나란히 거론될 만큼 커졌다. 그날 밤, 차현우는 임지유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애틋하게 입을 맞췄다. “지유야, 넌 내 몸의 일부야. 뼛속까지 스며든 사람.” 임지유는 모든 것이 이제 제자리를 찾는 줄 알았다. 차현우의 곁에 설 자격을 증명했고 차씨 가문 어른들의 태도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차현우는 자기보다 아홉 살 어린 한 소녀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듯 천진난만했고 그는 지아의 애교에 무너져 내렸다. “현우 오빠, 오늘은 꼭 같이 있어 줘.” “현우 오빠, 이 문제 모르겠어. 도와줘.” “현우 오빠, 내 첼로 대회 꼭 와야 해. 안 오면 나 연주 안 할 거야...” “차현우, 나는 오빠가 정말 좋아.” 임지유는 한 번도 차현우에게 애교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사랑 고백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차현우는 생활도 서툰 지아의 일상을 대신 챙기며 곁을 내줬고 그 돌봄을 부담이 아니라 달콤한 책임처럼 받아들였다. 곧 헬기가 도착했다. 차현우는 차세준이 탄 배가 돌아오는 것조차 기다리지 않고 헬기에 올라 M국으로 향했다. 로터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임지유가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차현우에게 끊겼다. 결국 임지유는 문자를 보냈다. [우리 아들은 언제 돌아와?] [세 시간 뒤. 임지유, 지아는 친구가 부탁하고 간 아이야. 나를 삼촌이라 부르는 아이라고. 맡은 걸 저버릴 수는 없어.] 그 몇 줄짜리 변명에 임지유는 씁쓸하게 웃었다. ‘맡은 바를 저버릴 수 없다고?’ 곧 다른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지유 언니 제가 현우 오빠를 사랑하면 어때서요? 오빠가 저와 함께하길 원하셨고 밤마다 언니가 아닌 저를 찾아오셨어요. 언니에게는 이미 마음이 식으셨잖아요. 더는 붙잡지 마세요. 오늘 밤에도 학교로 저를 찾아오셔서 호텔에 갔고 제가 입은 토끼 잠옷을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 그리고 차마 보기 어려운 영상마저 있었다. 화면 속 차현우의 광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임지유는 휴대전화를 꺼버리고 바닷가에 앉아 차세준이 돌아오기를 멍하니 기다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눈물은 금세 말라붙었다. 예전의 임지유는 내가 차현우를 사랑하면 됐다고 믿었다. 외도를 알았을 때도 남자란 잠깐의 자극을 찾을 뿐이라며 가정은 지켜야 한다고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지금의 임지유는 생각을 바꿨다. 어릴 때부터 임지유에게는 기대설 곳이 없었다. 부모의 사랑도 품어 줄 친척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만은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으로 버텨 왔다. 그런데 끝은 또다시 무너짐이었다. 임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의 파일 하나를 열었다. 상장을 앞두고 미리 서명해 둔 이혼 합의서였다. 혼인 관계 해소와 함께 차진 그룹의 지분 전부 포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상장 직전 차현우의 아버지 차국종이 조용히 임지유를 불러 말했다. “지유야, 네가 서명하면 내가 힘을 보태겠다. 차현우가 G증권거래소 상장을 원한다. 내 도움이 있으면 차진 그룹이 차영 그룹과도 겨룰 수 있어.” 임지유는 차현우와 그의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리고 차현우를 믿었기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서명했다. 차현우가 자기를 버릴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도 약속도 모두 달라져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보던 임지유는 짧게 문자를 보냈다. [네. ‘오션 도어’에 합류하겠습니다.] ‘오션 도어’는 세계 최정상급 해양 의생명 연구 컨소시엄이다. 한 번 합류하면 해저 연구기지에서 30년 동안 외부와 사실상 완전히 단절된 채 생활해야 한다. 임지유가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분명했다. 아들 차세준을 함께 데려가는 것. 이제 차현우는 임지유와 차세준을 영영 찾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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