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오션 도어’로 가려면 임지유는 자신이 홀로 완성해 온 핵심 연구 성과를 반드시 가져가야 했다. 문제는 그 모든 데이터와 샘플이 연구실 안에 있다는 것. 게다가 그 연구실은 임지유와 차현우의 지문과 비밀번호 동시 인증이 있어야만 열리는 구조였다.
얼마 뒤, 차세준이 돌아왔고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금세 곯아떨어졌다. 임지유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세준아, 엄마랑 떠날래?”
차세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뜨고 훌쩍였다.
“엄마... 나, 바다로 떨어질 뻔했어요.”
다섯 살짜리라도 무슨 일이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아이를 난간 밖으로 들었던 사람은 차현우의 최측근 비서였다.
임지유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세준아, 엄마랑 가자... 앞으로는 아빠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차세준이 두 팔로 임지유의 목을 감싸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계신 곳이 제 집이에요.”
임지유는 곧장 회사 본사로 향했다. 그녀의 지문과 비밀번호로 고층 연구동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지만 마지막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유리문 너머로 컴퓨터들과 정리된 샘플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 오직 그녀 혼자 만든 실험 전 자료만큼은 반드시 가져가야 했다.
“엄마, 어떡해요... 아빠가 없으면 이 문 못 연다면서요.”
그 순간 임지유의 머릿속에 연구실을 만들 때의 장면이 스쳤다. 차현우가 그녀를 안은 채 귓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지유야, 서로의 비밀번호는 서로에게도 비밀로 하자. 둘이 같이 와야만 열리게. 여긴 우리 회사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해두면... 우리는 끝까지 함께일 수밖에 없겠지.”
사랑할 때는 의지가 되지만 식고 나면 그 의지가 오히려 장벽이 된다. 5년 전 그 말을 할 때 지금을 상상이나 했을까.
연구실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임지유는 차세준을 데리고 2층 생활공간으로 올랐다. 결혼 뒤 오랫동안 둘은 회사에서 지냈고 지아가 나타난 뒤에서야 별장을 사서 집 흉내를 냈다. 이곳의 살림은 지아가 오기 전, 임지유와 차세준이 둘이서 하나하나 손으로 꾸민 것들이다.
임지유는 자신의 물건을 모조리 추려냈다. 차현우가 사 준 것들, 임지유가 차현우에게 주었던 것들, 한때 마음을 숨겨 사 모은 커플 소품들까지. 그리고 차세준도 자기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해 넣었다.
“아빠가 사준 건 두고 가고 엄마가 사준 건 가져갑시다. 이건 우리 가족 사진... 두고 가고.”
차세준은 봉투 세 개를 놓고 순식간에 분류를 끝냈다. 임지유는 울음을 삼키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차현우, 너는 세준이가 얼마나 영리한지 알기나 할까.’
아이는 말하지 않아도 버림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차세준이 달려와 임지유를 꼭 끌어안더니 작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엄마, 엄마는 늘 그 연구실 이야기하셨잖아요. 바다는 지구의 4분의 3을 덮고 있으니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요. 엄마는 그 일을 하러 가시는 거죠? 엄마가 그걸 제일 잘 하시잖아요. 저는 엄마를 따라갈게요. 엄마의 꿈, 제가 함께 지킬게요.”
임지유는 거실 끝에 걸린 유화 앞에서 발을 멈췄다. 차현우는 그림도 잘 그렸다. 차세준이가 두 살이던 해, 둘을 나란히 그려 넣은 그림이었다. 임지유는 곁의 물감 상자를 열고 붓을 집어, 캔버스 속 자신부터 천천히 덧칠해 지워 나갔다.
곧 차세준도 작은 붓을 들어 엄마를 따라 그림 속 자기를 조심스레 덧칠했다.
“엄마, 저 나중에 그림 배우면 엄마만 그려 드릴게요. 저 잘할 거예요, 이 그림보다 훨씬요.”
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차세준의 볼을 쓸어내렸다. 짐을 다 정리한 뒤, 그녀는 전화 한 통으로 집 안의 모든 물건을 실어 가게 했다. 함께 누웠던 침대, 소파, 주방 살림까지, 벽에 붙인 사진과 차세준의 낙서 자국도 전부 떼어냈다.
이어 새 페인트를 열어 여러 번 칠하고 또 칠했다. 집은 마침내 기둥만 남은 듯 텅 빌 만큼 비워졌고 벽은 눈 시리게 새하얘졌다. 흔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 한 줄도 남지 않았다. 부엌 찬장에 늘 채워 두던, 차현우 위장약도 한 알 없이 비웠다.
하루 밤낮이 꼬박 지나, 바닥에서 잠든 차세준을 안아 별장으로 돌아왔다. 문을 여니 거실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했다. 차현우의 차가운 얼굴에는 피곤과 초조가 뒤섞였고 충혈된 눈이 시뻘겋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지아가 학교 가자마자 왕따를 당했어. 온몸에 멍이 들었고 약 살 돈도 없대.”
그는 임지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몰아붙였다. 눈빛은 얼음처럼 식어, 마치 원수를 보는 사람 같았다.
임지유는 품에서 자는 차세준을 한번 내려다보고 담담히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준이 앞에서는 싸우지 마.”
임지유가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지아가 계단 위쪽 난간 앞에 나타났다. 하얀 잠옷 차림에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 겁먹은 표정으로 두 손에 치맛자락을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모, 저... 앞으로는 삼촌 안 붙잡을게요. 제발 저를 해외로 내보내지 마세요.”
그녀는 일부러 ‘이모’란 호칭을 또렷이 불러 나이를 덧씌우듯 들리게 했다. 불쌍한 표정으로 임지유를 올려다보는 사이, 차현우가 벌떡 일어나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지아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올려 뺨에 선명한 손자국을 드러내 보였다.
지아는 차현우의 품에 기대 훌쩍이며 말했다.
“이모, 저를 괴롭힌 애들은 Z국 학생들이래요. 누가 돈을 줘서 그랬다고요. 이모가 절 BK 음대에 보낸 게... 설마 절 괴롭히려고 그러신 건 아니죠?”
차현우의 눈빛은 끝까지 식어 있었다. 얼음 같은 시선이 1층의 임지유를 곧게 겨눴다.
“임지유, 네가 지아를 못마땅해해도 상관없어. 그래도 말했지? 스물다섯,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책임져. 지아 삼촌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가 지켜.”
차현우는 숨 고를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계속 물러섰는데도 넌 번번이 지아를 몰아붙였어.”
언성이 높아 지자 품에 안겨 있던 차세준이 눈을 떴고 차세준이 고개를 들려 하자 임지유가 낮게 속삭였다.
“세준아, 눈 감아. 듣지 마.”
임지유는 숨을 가다듬고 차분히 맞받았다.
“BK 음대는 세계 탑3에 드는 음대야. 거기서 왕따가 있었다면 신고하고 직접 조사해. 여기서 나한테 따질 문제가 아니야.”
지아가 계단참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더니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북성에서 학교만 다니게 해 주세요. 기숙사 들어가도 돼요. 한 달에 하루... 아니 반나절만 집에 오게 해 주세요. 저를 해외로 내보내지 마세요. 그 애들... 저를 진짜로 해칠 거예요.”
그 눈물에 차현우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는 임지유가 보는 앞에서 지아를 번쩍 안아 올리며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이따 서재에서 얘기하자. 먼저 지아부터 진정시킬게.”
임지유는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어깨에 기댄 차세준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엄마... 저희, 아빠한테서 조금만 더 일찍 떠날 수 있어요?”
“응. 엄마가 정리되는 대로 해볼게.”
복도를 지나 아이 방으로 향하던 중, 지아 방문이 반쯤 열린 채로 멈춰 있었다. 그 틈으로 스친 한 장면.
차현우가 지아를 침대에 눌러 앉히고 있었고 그의 손은 하얀 잠옷 안으로 깊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임지유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 섰고 눈가가 뜨겁게 저렸다.
‘차현우, 네가 지킨다는 게 이런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