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고의찬은 잠시 망설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의사 불러올게.”
하가윤은 이를 악문 채 겨우 몇 마디 했다.
“잊었어? 이 별장은 내 명의로 되어 있어. 그러니 네 애인과 잡종 데리고 꺼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자극적인 냄새가 코안으로 스며들었다.
남자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우리 엄마 때리지 마! 나빠!”
어느새 소파에 기어오른 고유현이 바지를 벗고 하가윤을 향해 오줌을 눴다.
이 말을 들은 고의찬은 기쁨에 겨운 얼굴로 고유현을 안아 올렸다.
“유현이 정말 대단하네! 엄마를 지킬 줄도 알고!”
고의찬은 하가윤의 초라한 모습과 망가져 버린 웨딩드레스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고의찬이 아이에게 칭찬을 하는 사이 하가윤은 아이의 오줌 냄새를 꾹 참으며 휴대폰을 집어 든 뒤 아이를 안고 있는 고의찬의 영상을 찍었다.
고의찬은 민효영더러 아이에게 옷을 갈아입혀 주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부한 후에야 하가윤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정해, 3일 후에 웨딩드레스 맞추러 가자. 데리러 올게.”
하가윤은 코웃음을 치며 고의찬을 바라봤다.
“이게 바로 네가 그렇게나 큰 기대를 거는 고씨 가문 상속자야? 아무 데서나 옷을 벗고 오줌 싸는 게 남자 덕에 출세하려는 자기 엄마와 똑같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고의찬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하가윤은 큰 소리로 경호원을 불러 세 사람을 모두 쫓아냈다.
하가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고의찬은 그제야 말투를 조금 가라앉히며 한마디 했다.
“효영이 체면 봐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게.”
말을 마친 뒤 민효영과 고유현을 데리고 돌아서 떠났다.
텅 빈 거실은 그제야 고요함을 찾았다.
하가윤은 엉망진창인 바닥에 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본인이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엄마가 남긴 유일한 유품마저 하루아침에 망가뜨렸다.
눈물을 닦아낸 뒤 다시 민효영의 소속사에 연락했다.
“민효영 관련 스캔들 있나요? 이메일로 각 연예 웹사이트 전부 보내세요.”
...
하가윤은 고의찬이 그녀의 체면을 구겼으니 적어도 며칠은 냉전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고의찬이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유현이 생일이 곧 다가오니, 생일 파티 준비해. 그리고 선물도 같이, 조상들에게 아이를 소개할 거야.]
어이없는 말에 냉소를 터뜨린 하가윤은 고의찬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
‘고유현에게 생일 파티를 해주라고? 고의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가윤이 집사에게 제주도행 비행 티켓을 예매해 달라고 하자마자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사생아 생일 파티를 위해 고우 그룹 대표이사가 자사 브랜드 ‘소원’ 선물, 대놓고 돈 자랑!]
‘소원’이라는 두 글자를 본 순간 하가윤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소원은 하가윤이 엄마부터 물려받아 수년간 고심하며 운영해 온 의류 브랜드였다.
그런데 고의찬은 잡종의 생일 선물로 브랜드를 줬다.
다른 걸 돌볼 겨를도 없이 바로 차를 몰고 회사로 달려가 고의찬이 있는 사무실 문을 걷어찼다.
“고의찬, 미쳤어? 내 명의로 된 브랜드,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함부로 건드리는데!”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에 하가윤은 한참이나 멍해 있었다.
고의찬이 민효영을 품에 꼭 끌어안고 채 키스를 하고 있었다. 떨어지기 싫어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서류를 들고 있는 비서 몇 명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불안한 얼굴로 하가윤을 바라봤다.
하가윤이 들어오자 비서들은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고 대표님에게 사인 좀 해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이 서류 지금 당장 사인이 필요한 거라...”
하가윤은 온몸이 통제할 수 없이 떨렸다.
전에 고씨 가문의 십여 명 젊은이 중에서 고의찬이 정실부인의 아들이자 제1상 속자라는 신분만을 보고 비즈니스 결혼 상대로 고른 것은 아니었다.
사업에 대한 고의찬의 활기찬 야망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다.
예전의 고의찬은 일할 때만큼은 방해하는 사람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전부 쫓아냈다. 심지어 하가윤조차도 그에게 쫓겨났다.
그런데 지금 고의찬은 일까지 내팽개친 채 하가윤 앞에서도 주변에 사람이 없는 듯 민효영과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고의찬!”
하가윤은 참지 못하고 고의찬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눈을 뜬 고의찬은 꿈에서 깬 듯한 모습으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하가윤은 고의찬의 말 따위 무시한 채 두세 걸음 앞으로 나아가 탁자 위의 재떨이를 쿵 하고 내동댕이쳤다.
“민효영의 사생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한숨을 내쉰 고의찬은 민효영에게 나가라고 손짓한 뒤 손을 뻗어 하가윤의 얼굴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유현이는 내 핏줄이야, 난 유현이로 아버지 마음도 사로잡아야 해. 효영이 심기도 건드리면 안 되고... 나 얼마나 힘든지 알아? 좀 이해해 줄 수 없어?”
어디선가 본 듯한 고의찬의 이 모습... 하가윤은 순간 예전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고의찬이 고우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빨리 약혼하자고 했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고의찬의 힘듦이란 바로 사리사욕을 위해 거짓말로 하가윤을 꼬드겨 그녀를 희생하게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는 고의찬을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고씨 가문의 재산은 네가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지만 소원은 내 거야, 내 피와 땀으로 만들어 낸 거야.”
“원하는 게 대체 뭐야? 내가 혼인 신고 안 해줘서 그래? 그래서 불안한 거야?”
고의찬은 하가윤을 벼랑 끝으로 몰 생각인지 연달아 다그쳤다.
고의찬이 쏟아부은 실망 어린 시선에 하가윤은 이 모든 게 우습기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립 탐정이 보낸 유전자 결과지를 꽉 쥐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고유현이 고씨 가문의 핏줄이든 아니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차라리 고의찬이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걸 온 세상에 까밝힌다면 그것보다 더 통쾌한 건 없겠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전자 결과지를 받았을 때 하가윤은 사람을 시켜 유치원에 있는 고유현을 차에 태워 산속으로 보냈다.
하가윤이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의찬도 기다리다가 조금 지친 듯했다.
“그럼 네 소원대로 해줄게.”
고의찬이 하가윤을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중심을 잃은 하가윤은 온몸을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바닥의 흩어진 장난감 위에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고의찬은 하가윤이 넘어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구청으로 가려 했다.
‘절대 가면 안 돼!’
하가윤이 다른 사람과 혼인 신고한 것을 고의찬이 알게 된다면 그동안 하가윤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따르릉.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얼어붙은 사무실 안의 분위기를 깨며 울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든 하가윤은 이내 고의찬과 눈이 마주쳤다.
이것은 하준호의 번호 때만 울리도록 설정한 전화벨 소리였다.
고의찬도 이내 하준호가 전화를 건 것을 눈치챘다.
순간 심장이 조여든 하가윤은 마음속으로 이유 모를 불길한 예감이 치솟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