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하가윤 씨, 당장 병원으로 와주세요. 아버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빨리 와서 서명해 주세요.”
깜짝 놀란 하가윤은 저도 모르게 뒤로 쓰러졌다.
“가윤아!”
당황한 고의찬이 하가윤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를 일으키려 할 때 뒤에서 비서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대표님, 민효영 씨가 휴게실 화병을 실수로 깨뜨렸습니다. 가서 보시겠습니까?”
“가자!”
하가윤을 잡고 있던 고의찬은 즉시 그녀를 내팽개친 채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넘어진 하가윤은 무릎이 순식간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바닥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간 후 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한 통, 두 통... 스무 통 넘게 하준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럴수록 하가윤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조금 전 의사와 고의찬의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아 허리를 굽히고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이 음식물 찌꺼기로 얼룩진 옷을 적셨다.
‘아빠, 꼭 아무 일 없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고유현과 민효영더러 목숨으로 이 빚을 갚으라고 할 것이다.
병원문 앞까지 왔지만 이때 옆에서 경호원이 뛰쳐나와 하가윤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회사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하가윤은 고씨 가문 사모님의 체면 따위 신결 쓸 겨를이 없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경호원을 향해 고함쳤다.
“꺼져! 우리 가족이 위험한 상황이야! 내 서명을 기다리고 있다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너희들, 책임을 질 수 있어?”
하지만 경호원들은 하가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양쪽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하가윤은 익숙한 마이바흐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민효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한마디 했다.
“넌 그런 꼴 당해도 싸!”
물론 겉으로 내뱉은 게 아니라 입 모양으로만 말했지만 하가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말을 마친 민효영은 고개를 돌리더니 고의찬의 팔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
“가윤 씨도 고의로 그런 건 아닐 거야. 의찬 씨, 가족이 위독하다잖아. 서명하게 해줘.”
여기까지 말한 뒤 잠시 멈칫하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하가윤을 바라봤다.
“하가윤 씨도 딸이 하나뿐이잖아, 이대로 돌아가시면 하씨 가문마저 없어질 텐데? 전부 고씨 가문이 되겠네...”
“넌 마음이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고의찬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뻗어 민효영의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가윤 수술실로 데려가 서명하게 해, 그리고 장인어른을 잘 돌보고.”
하가윤은 또다시 강제로 경호원에게 이끌려 병원 위층으로 향했다.
몸은 혼이 나간 것처럼 경호원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정신은 아주 말짱했다.
이 순간 하가윤은 고의찬의 가장 악랄한 목적을 깨달았다.
하가윤이 부산 재벌가 딸이라는 출신 때문에, 그리고 하씨 가문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그녀를 고씨 가문 안주인으로 맞아들인 것이었다.
하준호가 죽은 뒤 하가윤이 고유현을 친아들로 인정하기만 하면 고의찬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두 가문의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정말 철저히 계산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하가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않은 탓인지 위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배는 누군가에게 걷어차인 듯 아파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수술실 문 앞까지 왔다.
온 힘을 다해 경호원의 속박에서 벗어난 하가윤은 필사적으로 하준호의 이름을 불렀다.
끽소리와 함께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마스크를 벗으며 나온 의사는 하가윤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환자가 아주 위독한 상황입니다. 해외에서 특효약을 구하지 못한다면 요 며칠을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 저희 아빠 구해주세요!”
다리가 풀린 하가윤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해외에서 만드는 약이라 우리나라에서는 고우 그룹만 수입할 자격이 있습니다.”
하가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생님, 우리 아빠 꼭 살려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휴대폰 잠금을 풀고 고의찬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위독해. 고우 그룹에서 수입하는 특효약이 필요해. 돈은 얼마든지 줄게.”
“가윤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넌 알고 있잖아.”
수화기 너머로 고의찬의 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미심장한 고의찬의 한마디와 함께 하가윤은 입안에 비릿한 냄새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아찔해지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정신을 차린 하가윤은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할게. 우리 아빠 좀 구해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우 그룹 사람이 특효약을 가져왔다.
하가윤은 초조한 얼굴로 병식 밖을 지켰지만 고의찬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복도를 오가는 간호사들은 하가윤의 뒷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수군거렸다.
“저 여자, 하가윤 씨 아니야?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있던데... 너무 불쌍해.”
“고 대표가 그 새 애인에게 애정을 많이 쏟더라고. 피부가 살짝 긁혔을 뿐인데 병원 전체 전문의를 VIP 병동으로 불렀잖아. 그래서 여기에 인턴 의사 몇 명밖에 안 남았어.”
하가윤이 간호사에게 달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수술실에 인턴 의사들만 남았다고요?”
하가윤의 모습에 놀란 간호사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네, 고 대표님이 사망자를 병원에 기부하셨어요. 인턴 의사들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라고요...”
‘시체, 기부, 도움...’
단어들 하나하나 조합한 하가윤은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아빠가 이미 돌아가셨다고? 그럴 리가!’
의사가 조금 전까지 특효약이 있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효약만 있으면 아빠를 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수술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하얀 천으로 덮인 사람을 본 순간 누군가가 망치로 그녀의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인턴 의사들이 몰려와 하가윤을 막으려 했지만 그들을 힘껏 밀쳐낸 뒤 비틀거리며 수술대 앞으로 기어갔다. 손으로 하얀 천을 꽉 움켜쥔 순간 온몸이 거침없이 떨렸다.
하얀 천으로 덮였던 시체의 얼굴 절반이 드러난 것을 본 순간 하가윤은 눈빛이 흔들렸다.
이 사람은 하가윤의 아빠가 아니었다.